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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단 Nathan 조형권 Mar 31. 2024

어느 직장 동료의 죽음

직장인들에게 월요일 오전은 바쁘다. 주말 동안 밀렸던 업무를 처리하고,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해서 이메일을 읽고, 회의 자료를 리뷰하고 있었다. 오전 10시경에 ‘부고’ 이메일이 왔다. 일단 나와 연관이 있는 분인지 확인해 보니, ‘본인상’이었다. 향년 55세.


조직도에서 성함을 치고, 사진을 확인해 봤다.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 특히 가까운 사람(적어도 회사 동료)이 세상을 떠나면 순간 주위가 조용해지는 기분이 든다. 갑자기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잠시나마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조금 더 관조적으로 일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 떠나면 끝인 것을…’


몇 분 간의 안타까움과 무상함을 느끼고, 다시 업무를 시작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깐.


점심에 샐러드를 테이크아웃 하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예전에 그 분과 같은 일했던 분들을 만났다. 이미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상갓집에 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무래도 부인과 자식들이 상주이다 보니,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리라. 다른 부서 동료의 눈가는 살짝 젖어있었다. 그분과 더 많은 추억을 갖고 있는 분들은 아마 이러한 '죽음'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첫 번째 하는 질문은 고인의 사망 원인이다. 특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심장이 안 좋았고, 나중에 신장에 암이 생기고, 그것이 다시 폐에 전이되고…“


고인께서 평소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을 같이 보냈던 다른 동료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고기 좋아하시고, 술 좋아하시고, 사람 좋아하시고… 물론 유전적인 요인도 있기 때문에 꼭 먹고 마시는 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오랫동안 건강이 안 좋던 고인은 이제 떠났고, 아내와 아이 셋을 남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장성해서, 스스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나중에 결혼할 때, 아빠의 부재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을 접하게 되면 겸허해진다. 그리고 나의 가족을 돌아보게 된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추억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주변에 더 많이 베풀고 싶다. 최선을 다해서 살고, 내일 죽더라도 그나마 덜 후회하고 눈을 감고 싶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는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라,”라고 했다. 특히 마흔이 넘으면, 죽음의 그림자는 더 가까워진다. 사고, 질병, 스트레스 등 다양한 요소가 있다. 


예전에는 마흔에 죽으면 다들 이른 죽음이라고 여겨서 놀랐지만,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반응도 있다. 어쩌면 ‘죽음의 가시권’에 들어오는 나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흔은 미혹되지 않아야 하는 '불혹'인 동시에, 그만큼 많은 유혹에 시달리는 나이이기도 하다. 더 성공하고 싶고, 더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더 명예를 얻고 싶고. 그렇다보니 더 열심히 일하고, 초조해하고, 잘 안 될 때는 스트레스를 받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하지만 그러한 '욕구'와 '절망'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준다. 물론 99%의 사람들은 그 교훈을 금방 잊거나 무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약 내게 한 달간의 삶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여행을 가거나 평소 못 가던 맛있는 레스토랑에 갈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 것이다.


의미 없는 관계,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들, 대신에 자연과 함께 하고, 가족, 친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죽으면 끝이다, 모든 것이 끝이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남은 가족들도 마음을 추스르고, 아버지의 몫까지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P.S : 나중에 고인의 자녀 분들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아빠가 평소 회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인을 추모하는 수많은 동료들을 보니, 아빠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빠의 죽음에서도 무언가 의미를 찾은 것이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싶고, 죽음은 더욱 그렇다. 의미가 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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