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모크가 쏘아올린 꾿빠이 이상과 친구의 초상
※뮤지컬 '스모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김연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을 완독했다.
이 책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읽게 된 동기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2021년 2월 6일에 나는 시인 이상을 소재로 한 뮤지컬 ‘스모크’를 보았다. 공연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이런 시>가 다르게 읽혔다. 그간 이 시는 금홍을 향한 이상의 사랑을 그린 시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시에서 ‘그대’가 금홍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시(詩)’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 이상 <이런 시> 중에서
이십 세기는 밝아 왔는데 내 천지는 온통 암흑이었소. 암흑 속에서 나 혼자 발광하였소. 암흑 속 발광, 나는 발광하였으나 칠흑 같은 암흑이라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소. 기실, 나는 광이 나질 않았나 보오.
-뮤지컬 ‘스모크’ 가사X대사 봇 (트위터 @musical_smoke)을 참고함
자신은 한 평생에 시를 사랑했으나 생에 못 올 사랑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는 꾸준히 생각했고 내내 어여쁘길 바란 사랑이었다. 이렇게 해석하고 나니 이상이 궁금해졌다. 어떤 마음으로 시를 쓰고 암흑 속에서 나 혼자 발광하는 삶이란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할 때 읽는 것만큼 좋은 동기는 없다는 생각에 뮤지컬 ‘스모크’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잽싸게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2.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 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라는 이상의 동생 김옥희의 회상을 읽는 순간, 어딘가에 있을 『꾿빠이, 이상』이란 소설을 떠올렸다는 김연수 작가님의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장편소설이다.
매주 기획안에 올라 있는 기삿거리를 취재하고 오십 매 안팎의 글을 쓰는 인간에 불과한 기자에서 이상의 데드마스크에 대한 진실을 좇게 되는 김연화 시점의 1부 <데드마스크>, 이상이라는 한 작가의 존재는 물론 이상의 삶과 문학을 닮기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아마추어 이상 연구가 서혁민 시점의 2부 <잃어버린 꽃>, 워싱턴 대학교 예술학부를 졸업하고 UCLA에 가서 비교문학을 전공한 재미교포 이상 연구가 피터 주 시점의 3부 <새>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에 ‘이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2부에서 와타나베가 들려준 「백병」이라는 소설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앞서 소개한다. 소설에서 젊은 작가는 점차 자기 자신이 분리되는 모습을 목도한다. 자신을 닮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 그러니까 또다른 자신의 분신과 이제 그만 헤어지려고 하는데, 이것만이 소설 속 등장인물의 과대망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서혁민은 이렇게 말한다.
"그간의 이상 작품과 비교하면 아주 이상한 줄거리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군요. 소설 속 등장인물 이상과 작가 김해경이 일생일대의 결투를 벌여 이상 쪽이 승리를 거둔다는 얘긴데......(후략)“
(p.137-138)
왜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가 하면, 뮤지컬 ‘스모크’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다. ‘스모크’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바다를 향한 꿈으로 가득한 해(海)는 나쁜 짓인줄 알면서도 홍(紅)을 납치하려는 초(超)에게 동조한다. 하지만 해는 초가 몸값을 얻어내기 위한 전보를 치러 나간 사이에 기침으로 괴로워하는 홍을 풀어주고, 홍은 해에게 다가간다.
“나... 모르겠어?”
갇힌 공간 두 남자와 한 여자. 이들은 과연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다. 시를 쓰는 자, 초(超) 바다를 그리는 자, 해(海) 마음을 들여다보는 자, 홍(紅) 모두 이상 자신이었다. 시놉시스와 함께 <오감도 시 제15호>의 일부가 소개 페이지에 실린 것으로 보아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백병」이라는 소설이 실재하는 소설이었다면, 이 소설 역시 일찍이 뮤지컬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은 이야기였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은 1부에 있다.
지금은 물론 서씨라는 사람에 대해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굉장히 모호하고 시시때때로 엇나가는 감정이다. 이제 그는 서씨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 그는 분명히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서씨였다. 이관장도 인정하지만, 서씨로서의 그에게서 우리는 어떤 부조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완벽하게 이상 숭배자를 형으로 가진 서씨라는 인물을 흉내냈다고 하더라도 그는 바로 서씨 자신이다. 왜냐하면 이상에 대해 말할 때의 그 뜨거움을 그토록 흉내낼 수 있다면, 그를 가짜라고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뜨거움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확인할 길이 이제 사라졌지만, 그런 종류의 뜨거움이라면 누구도 진위를 가려낼 수 없다.
(p.51-52)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시간과 깊이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그것을 좋아해 온 기간과 그렇게 쌓아온 세월은 쉬이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긴 하나,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것을 좋아해 온 시간에 무조건 비례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서씨에게 동요하는 김연의 마음에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을 속여서는 안 되는 일이다) 본인 역시 김연화가 아니라 김연으로 자리했던 김연화의 생각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완벽하게 다른 인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그를 가리켜 다른 인물의 몸동작을 흉내내는 원숭이라든가, 다른 인물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하는 앵무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p.52)
이 구절은 단순히 서씨를 두고 한 생각이 아니라 이상의 인생과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다. 3부에서 피터 주는 입양기록증과 『이상 전집』 둘 중 어느 쪽이 과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한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입양기록증을 불태우며 불멸의 천재 이상이 아니라 얼굴 하얀 아이 김해경의 탄생을 축하하는데, 여기서 이어지는 구절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은식기가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어난 그 아이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의 가면을 쓰고 죽어버렸다. 그렇게 죽음으로써 영원한 비밀 하나가 그 아이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삼십일년 삼십이년 일'. 그 비밀이 있었기에 얼굴 하얀 아이 김해경은 부러진 날개를 가지고 영원한 작가 이상이라는 어둠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 비밀이 뭔지 알 수 없는 한, 이상이란 미친놈의 개수작에서 위대한 명작 사이를 한없이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었다. 진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진짜처럼 보이고 가짜라고 믿는 자에게 그 세계는 가짜처럼 보인다. 김해경은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 이상에게 자리를 내주고 자신이 간직한 비밀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p.285)
이상이 숨을 거둔 이유는 1937년 2월, 도쿄에서 불령선인(사상불온혐의)으로 체포되어 도쿄 니시칸다 경시청 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 병보석으로 한 달 만에 석방될 만큼 심해진 폐병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단순히 이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책을 읽고 난 뒤 김해경의 선택이었다고 믿기로 했다. 그는 책 속 구절처럼 김해경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는 운명에 맞서 영영 이상이 되리라는 의지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라는 자신의 글을 완성했다고 믿는다. 뭔가를 감추고 저주받은 천재의 증거만을 남기고 떠났기에, 그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허전하지 않은 이상으로 남은 것이다.
3.
한 작가는 문학을 위해, 독자를 위해 삶의 다양한 광경을 재구성한다. 천재로 태어나는 주인공을 탄생시켜 그 주인공으로 하여금 열정에 사로잡혀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다니게 만들고 사랑에 빠지게 한다. 적당한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내기 위해 막 딴 치커리와 꽃상치를 잘 포개 만든, 여름 점심의 쌈밥을 만들기도 하고 연인 앞에서 처음으로 벗은 몸처럼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교차하는 하얀 살을 그리기도 하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일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던져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p.91)
읽는 동안 한 번도 쉬이 읽힌 적이 없어서 완독하면 시원하기만 할 줄 알았다. 굿바이, 이상! 정말 그럴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7호선 안에서 완독한 기분은 그저 섭섭함 가득한 마음이었다. 뭐지? 정이 든 건가? 날자 날자 날아보자꾸나 하던 이상이 기다렸다는 듯 날아갔다. 저이 떠나간 자리에서 남은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쓰지 않고서는 결코 꾿빠이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뮤지컬 ‘스모크’ 덕분이었다. 이 작품을 보고 싶게 만들어준 애정하는 두 배우 에녹, 이정화 배우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겨우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그날 내가 스모크에게서 얻은 생명력은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두 배우와 함께 열연해 준 해, 강은일 배우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닿기를.
나는 이제 다음 책을 향해 날아간다. 굿바이, 김해경! 꾿빠이, 이상!
뮤지컬 '스모크'가 쏘아올린 공은 『꾿빠이, 이상』 완독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즈음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알게 되었고, 지금이 아니면 그의 친구 구본웅이 그린 '친구의 초상'을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미술관을 찾았다. 뮤지컬 '스모크'와 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을 통해 그의 삶을 생각했을 뿐인데 초상이 달리 보였다.
그는 비밀로 하여금 재산이 있는 것처럼 가난하지 않고, 허전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까. 기실, 광이 나는 삶을 살고 있을까.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친구의 초상 앞에 멈춰 있던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