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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싸 May 07. 2021

없으면 보이는 것들

'모리스디페렌테'(다른삶) 08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2013년의 일이다. 오전에 마을에 다녀온 마웅 줄리오가, 오는 길에 보니 일본 NGO AFMET이 타고 있더라고 말씀해주셨다. 깜짝 놀라서 그게 무슨 이야기냐고 되물으니, 말 그대로란다. 아프멧은 로스팔로스 중심가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사무실과 주거 건물, 주민 대상 클리닉 건물이 같이 있다. 마웅 줄리오는, 연기가 뭉게뭉게 나고 사람들이 둘러싸서 구경하고 있더라고 말씀해주셨다. 아니 그럼 소방차는 언제 오냐고 물어봤더니 사실상 올 수가 없단다. 소방서는 바우카우 Baucau에나 있고, 로스팔로스에는 없다고.

헉!이다. 

사회적 인프라가 없다는 것의 의미가 이런 거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바우카우는 차로 2시간 30분 ~ 3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소방차를 부른 들, 오는 새 건물은 이미 다 타 버리고 없을 것이다. 외국 NGO라니 더 남 일 같지가 않다. 우리 사무실도 행여나 불이 나거나 하면 소방차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그 날 오후에 업데이트된 소식을 들으니 클리닉 빼곤 다 탔다네. 


여기 오기 전엔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사회 인프라'라고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은 소방서 말고도 더 있다 - 운전 면허장과 우편 서비스. 

로스팔로스에는 면허를 따지 않고 오토바이 모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일단 면허를 취득하려면 로스팔로스에서는 안 되고, 수도 딜리나 제2의 동네인 바우카우까지 가야 한다. (*지방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특별 시험을 따로 실시할 때도 가끔 있다) 시험 일정도 알아보기가 어렵고, 예약은 당연히 안 되고, 막상 가서 사람이 많으면 시험을 못 볼 수도 있다. 제일 가까운 소방서가 2시간 30분 거리 바우카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일종의 충격과 깨달음 -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운전면허 시험 시스템도 인프라구나” - 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 로스팔로스가 나름 동티모르 제3의 동네인데 이 정도다. 시골에서는 면허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겠다. 

현지인 직원들이 오토바이를 딜리에서 구매해 버스 뒤에 싣고 로스팔로스로 오고 (처음에는 딜리서 구매를 한다길래 어디에 싣고 와야 하나, 트럭을 빌려야 하나 싶었는데, 나름대로 방법은 다 있다. 보기에는 그다지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는데, 시외버스 뒤쪽에 노끈으로 꽁꽁 잘 묶어서 오토바이 3대가 모두 무사히 로팔에 도착했다.), 회의를 통해 대략 한 달 후엔 직원 모두 면허 취득합시다라고 이야기했었다.

시험 보러 바우카우에 가는 것도 큰일인데 (왕복 최소 5시간...)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험 일자가 또 그때그때 다르다고. 필기는 월요일, 구술은 화요일, 실기는 그 일주일 후 등등...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단다. 이미 면허를 취득한 마웅 페드로도 다시 바우카우로 면허증을 가지러 가셔야 한다. (일반 국내 우편 시스템 없음. 우체국은 딜리와 바우카우에 하나씩 있긴 하다. 딜리 우체국에선 한국으로 편지나 엽서를 보낼 수 있다. 한국에 도착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6개월 넘게 지났을 때 한꺼번에 도착할 때도 있다.) 

거 참, 간단한 게 하나도 없다. 모든 행정과 당연한 줄 알았던 시스템의 인프라가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국에선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되는 줄 알고 있다가, 10분 거리 동네 동사무소 가야 할 서류가 있으면 툴툴 대며 불편하게 인터넷으로 안 된다고 종알 대었는데… 


수도 딜리와 지방을 오고 가는 시외버스. 20~24인승 정도이다.  버스 위, 뒤에는 오토바이, 냉장고, 염소나 돼지 (살아있는 상태!), 사람이 다 같이 탄다.


기본적인 물과 화장실 역시, 어려움을 겪는다. 현지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사정이 좋은 외국 단체인 우리 역시 마찬가지. 예외 없다. 

사무실의 화장실과 물 때문에 근 6개월 넘게 골치가 아팠었던 적이 있다. 2013년 12월부터 단수가 되었는데, 영 상황 진척이 되질 않는다.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절 묻어놓은 관이 노후화되어 수도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로, 수도관리국에 문의를 하여 교체를 요구했더니 예산이 없단다. 우리 사무실은 지역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관계로, 도서관이 위치한 학교 2개와 같은 공간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학교 2개도 똑같이 단수가 되었다. 즉슨 몇 백 명의 학생들, 우리 단체 직원들, 도서관에 오는 학생들 모두가 화장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셈! 수도공급이 되지 않으면, 학교 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큰 수조에 채워놓고 쓴다. 힘든 것은 당연하고, 제한된 양만 쓸 수 있다.  

공공시설, 게다가 교육시설이니 당연히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사정을 알기도 하고, 당장 물이 없어서 답답한 것은 우리이니, 견적이나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파이프 교체 등 자재 실비만 부담하면 자기들이 해 줄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니, 견적 내 온 것을 보니 노임비까지 다 넣어 900달러 가까이 되는 금액으로 가져왔다. 

수도관 교체와 같은 당연한 공공 서비스를 개개인의 영역으로 돌리는 것이, 정말 국가가 재정적으로 예산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너넨 돈 많은 외국인이니 그 정도는 너네 돈으로 하라는 심보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독립 후 이제 20년 남짓, 그냥 옆에서 척 보기에도 조세 제도가 잘 되어 있는 편은 아니고, 통계상으로도 티모르 해 석유 말고는 이렇다 할 세수가 없다. 재정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시민들이 정부에 대해 무엇인가를 당연히 요구한다는 분위기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인다. 450년 포르투갈 식민지, 25년 인도네시아 식민지, 그 이후 20년 남짓, 이제 겨우 안정되어 가는 자체적인 정부 - 어떻게 보면 정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시민들이 정부에 대해 당연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 모두 낯설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해 본다. 지역, 가족 단위의 연대의식은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국가-정부-시민 사회의 역할 정립은 무언가 어설픈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서 이방인인 우리만 제일 답답!)


우리 사무소와 도서관, 지역 학교 2개가 있던 곳. 저 잔디밭은 쉬는 시간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소, 염소, 돼지, 닭들이 차지한다.


하여간 우리도 예산편성에 없는 900달러를 각출하는 것도 골치이고, 돈 많은 외국인이니 그 정도쯤은 할 수 있지 라는 사고에 맞춰가는 것도 괘씸하고 해서, 같이 수도관이 연결된 학교에 우리 7: 그쪽 3 정도로 분담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학교 역시 돈이 없단다. 100달러 이상의 금액 지출은, 사용처 변경한 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그 절차가 까다로워서 귀찮다는 것인지, 그냥 싫은 건지… 수도관을 교체하면 학교 화장실 8개, 우리 도서관 화장실 2개가 같이 정상화되는데, 자기네 돈을 300 정도만 들이면 될 것을 그냥 절차가 귀찮다, 돈이 없다 이러고 있으니 답답하다. 

 

그러고 나서 근 6개월 정도가 지났나, 주 교육부 장관님을 만날 일이 있었다. 6개월 간 계속된 단수로 파이프 공사가 필요한데 우리가 반을 댈 테니, 교육부에서 반을 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단수'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뜸 “아, 그거, 정부에서 돈 나와서 공사 시작할 거야”라신다. 깜짝 놀라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오래 걸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빨리 해결이 되었다. 6개월간 참다 참다가, 우리와 교육부 반반으로 생각했는데 (어쨌거나 물은 써야 하니!) 이렇게 금방 (여기 기준으로 6개월이면 아주 양호하다) 해결이 되니 기뻤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일 답답했던 것은 우리 직원들, 아니 사실상 한국인 직원 셋이다. 주에 1~2회 정도 우리 현지인 직원분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물을 쓰기에, 제한적으로나마 물은 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을 편안히 못 쓴다는 것이, 한국에서, 특히 한국 대도시에서 계속 살아온 우리에게는 무언가 본질적으로 낯설고 불편하다. 이런 부분을 불편한 개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도 불편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활을 해 올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하지만, 거기에 평생 익숙해져 있다가 없으니 더 불편하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크게 느끼는 불편한 상황에 일상적으로 놓여있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불편한 감정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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