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싸 Oct 21. 2021

동네 바보?

'모리스 디페렌테' (다른 삶) 17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현지 직원분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동네 바보”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 주말 아침, K가 집 앞에서 남은 밥을 개에게 주려는데 왠 아저씨가 다가왔다고. 밥을 달라고 하며 계속 못 알아듣는 인도네시아어를 하길래, 좀 겁이 났었다고. 이 사람을 아느냐고 여쭤봤더니, 우리 현지 직원분들 왈, 이 동네 근방서 왔다 갔다 하는 꽤 알려진 “동네 바보 (=속된 말로 '이 구역의 미친 사람')”란다. 심지어 E 직원은 그 아저씨가 노래를 부르면서 톱질을 하는 영상까지 핸드폰에 녹화를 해 놓았다. 그건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니, 그 분께 노래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살짝 정신이 나간 분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시골 사람들의 멘탈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워낙 작은 규모의 공동체이다 보니, 정말 아주 이상하고 포악한 구석이 없는 이상, 그냥 혼자 룰루랄라 자유로운 미친 사람이라면, 어떤 격리나 배척 대신 (하긴 그런 시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당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여기 정서인 듯 하다. 가끔 놀리기도 하고, 가끔 구박도 하고, 가끔 같이 놀기도 하고… 약간 “동네 바보” 삘?! 로, 좀 무시하고 놀리고 하지만, 심각하게 격리나 소외의 대상으로는 생각하지는 않는 듯 하다. 


지능이 좀 떨어지거나 살짝 이상한 “동네 바보”를 동네 공동체서 거둬 먹이고 간단한 일을 시키고 하면서 거둬 먹이는? 정서는 왠지 옛날 우리나라에도 있었을 것만 같다. 나라나 시대에 관계없이 소규모 동네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다 그런 식으로 되지 않았을까. 지능이 좀 떨어지건, 규범이나 관습에 대해 자유로운 영혼이건, 현실 판단력이 떨어지건, 반항아이건, 주의력 결핍이건, 어떤 식으로건 “동네 바보”는 어디나 있을 수 밖에 없을진대… 대규모 도시화가 진행되기 전 소규모 공동체에서 한 두 명의 동네바보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거두고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대도시화, 대규모화와 더불어, 이러한 “인간적인 받아들임 혹은 어울려 살아감” 대신 “다르니깐 격리한다”로의 전환으로 되지 않았을까? (feat. 푸코??) 

그리고 나를 포함한 여기의  한국인들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혹은 구분, 외국인이기에 낯설어서 두렵고 조심해야 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떨 때는 그런 구분과 경계감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도하게 의식화 된 것인지 가끔 생각한다. 우리(한국인들)가 보기엔 분명 정상은 아닌 사람이 있고, 이에 대해 우리의 일차적인 반응은 무섭고 위협적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저런 사람은 시설에 보내서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 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 전개다. 


하지만, '미친 사람을 치료한다'는 전제는 과연 당연한 것인가? 미친 사람은 격리와 감시와 치료의 대상인가, 그렇다면 미쳤다는 것은 어떤 상태이고, 누가 그러한 '미쳤다 (그러니 가둬야 한다)'를 정의하는 것인가? 그러한 구조는 혹시 교묘화된 권력에 의해 당연시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해 볼 여지도 있다는 거다. “치료해 준다” “보살펴 준다” “개도한다” “발전시키다”라는 모든 좋아보이는 말에는,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주체의 현재 상태를 “치료받아야 할, 보살핌 받아야 할, 개선하고 발전해야 할” 상태로 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 주체의 현재 상태 혹은 그 자체의 개성이 가진 고유의 의의는 아주 쉽게 가려질 수 있다. 


이건 국제개발협력에서도 마찬가지. 발전시켜야만 하는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들은 항상 모자라다 혹은 불쌍하다, 그래서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는, 아직까지도 볼 수 있다, 예전만큼 분명하지 않고 교묘히 숨어있을 뿐.

물론 실제로 어떤 결핍이나 빈곤은 분명 존재한다. 또한 더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든, 언제든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미래에의 기대, 희망에의 기대 차원이 아니라, “좋은 탈”을 쓰고 획일화된 방향으로 끌어버리려고 하는 매커니즘에는 확실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