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디페렌테'(다른삶) 13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2014년 어느 날, 그간 벼르었던 사무소 차량 주차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사무실 건물 옆의 조그만 공터에 약 가로 3m, 세로 4m 정도의 주차 공간을 만들 자리를 봐두었다. 재료만 사면 우리 현지 직원분들이 할 수 있다고 하셔서 주 2회, 오전 나절을 건설 작업에 쓰기로 했다. (그렇게 같이 작업해서 2달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아침 8시 30분이 좀 지나면서부터 시작했는데, 땅을 고르고 기둥을 세울 자리 등 기본 구획을 줄로 매어 표시를 했다. 우리 현지 직원 아저씨들은 터를 잡는 것부터 땅을 고르는 것, 주변에 있는 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구획 표시를 할 줄을 맬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준비 과정을 척척 해 내셨다. 일전의 전통 “나뭇잎 찜 요리”에 이어, 주변의 자연물을 자연스럽게 그때 그때의 용도에 맞게 이용하는 생활지능과 응용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구획 표시를 한 후에는 토대를 30cm 정도로 올리는데, 다양한 크기의 돌을 둑처럼 쌓는다. 쌓으면서 돌의 틈새와 층 사이에 시멘트와 흙을 섞어 꼼꼼히 발라주어 돌과 시멘트, 흙이 서로 접착되어 단단하게 하도록 한다. 아저씨들은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해 내셨다.
페드로 아저씨에게
“이런 것은 대체 언제 배우셨어요?” 물어보니,
“결혼할 때. 결혼하려면 집을 지어야죠” 라신다.
이곳 로스팔로스에선 남자가 결혼 때 집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고, 물론 주위 친구나 친척의 도움을 받겠지만, 기본적으로 재료를 사서 직접 짓는 일이 아주 보편적이란다. 여자는 타이즈를 가져오고, 남자들이 농장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오는 동안, 집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를 키운다.
산업화, 도시화, 개인화된 우리 나라에선 결혼, 출산, 의식주, 사망에 이르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양식이 다 분업화가 되어 생산자와 소비자를 축으로 하는 거래 형태가 된 것이 이미 자연스럽다. 결혼은 웨딩플래너와 예식장, 출산은 병원과 산후조리원, 집은 건설회사와 대출받는 은행 및 기타 복잡한 부동산 제도, 옷과 음식은 뭐 너무 다양하고 많은 선택지가 있으니… 사망 역시 병원과 상조회, 보험 등.
이곳은 이 모든 것이 가족과 공동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며, 그만큼 개인의 품이 많이 들어가서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개개인이 자신의 생활의 영역을 자율적으로 꾸려 나가는 데 있어 축적된 지식과 역량은 훨씬 더 높은 편이다. 다들 집을 짓고, 가축을 기르고, 작물을 기르고, 요리를 할 줄 알고, 이러한 기본 생활 능력을 토대로 한 연계 생활운영능력도 자연스럽게 높다. 뿐만 아니다. 혼자 하기엔 불가능하기 때문에, 돈 내고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없기 때문에, 협력은 당연한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교양 -기본 생활 산수나 수학이라든가, 문학이라든가, 외국어나 컴퓨터 등- 의 수준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평균 대비 거의 없거나, 너무 낮은 것을 볼 때는 깜짝 놀라게 되지만, 기본 생활지능과 생활능력의 수준 역시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한국 도시인) 평균 대비 훌쩍 높은 것을 볼 때도 똑같이 놀라고 감탄하게 된다. 서로가 부족한 부분과 놓치고 있는 부분들이, 따로만 볼 때는 잘 모르다가, 대조를 통해서 부각되는 것이다. 그럴 땐 무척 겸허해진다.
로스팔로스 시장에서 바구니를 살 때도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바나나잎이나 야자수잎으로 아주머니들이 직접 손으로 짠 바구니는 쓰임새가 많다. 육각형 형태의 넓다랗고 높이가 짧아서 뭘 말리기에 좋은 접시형 바구니는 쓰기에도 좋고, 소박하니 예쁘다. 다른 하나는 여기 여자분들이 짐 운반용으로 흔히 쓰는 바구니인데, 지름 13cm, 높이 50cm 정도의 원통형으로 바구니에 연결된 끈을 이마에 둘러 사용한다. 나는 빨래 바구니로, 이런 저런 수납용으로 요긴하게 썼다. 이 바구니는 나뭇잎 끝 부분의 단단한 쪽을 바구니 밑바닥 쪽으로 넣어서 짜는데, 짜임새가 괜찮다. 이런 것을 보면 전체적으로 주위의 자연물을 적시적소에 이용하는 방법과 기술들이 전체적으로 참 일상적이다. 한국에선 무형문화재 정도 되어야 할 수 있을만한 손재주가 (물론 그 정도로 정교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선 꽤나 보편적이다. 다들 조금씩은 집도 짓고, 울타리도 만들고, 가축도 기르고, 농사도 짓고, 가구도 만들고, 바구니도 짜고, 손뜨개도 한다. 전반적인 생활인으로의 기능의 스펙트럼이 넓고 능숙하다.
도시에서의 삶은 분명 편하고, 예쁘게 찍어낸 다양한 물건들을 보고 소비할 기회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다들 조금씩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손재주를 쓸 기회를 절대적으로 제한하는 측면도 분명 있다. 물론 생활의 모든 도구와 재료들을 힘들게 일일이 다 만들고 기르고 해서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곰손이어서 그렇지, 금손들도 엄청 많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원래 잠재되어 있을 수도 있는 능력을 너무 안쓰다 보니 아예 퇴화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곰손인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분명 우리 모두에게 그런 연상능력? 종합 응용능력? 이 있겠지만, 산업화된 도시 생활자는 굳이 그런 능력을 쓸 필요가 점점 없어지니 저절로 퇴화될지 모른다. 도시에서는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완성품이 수십 가지가 되니, 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에 머리를 쓴다. 여기선 무엇인가 필요할 경우 주위를 둘러 보고, 재빨리 다양한 사물들의 특성과 목적에 적합한 부분이 있느냐 하는 합목적성을 파악하여 선택한다. 그리고 용도에 맞게 다듬고 만드는 일련의 종합적인 생활지능을 발휘한다.
그런 방식이 더 좋고 바람직하다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 인간이 애초에 자연스럽게 발달시켜 온 상황적응과 판단력, 종합응용력, 발견과 발명의 생활 적용력이, 도시 생활에서는 그냥 소비에 밀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지 않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는 얘기다. 무언가 “주체”가 아닌 “소비주체” 정도가 된다는 것에 경계심 비슷한 감정이 든다. 심지어 소비주체도 말이 주체지,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한없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원해서 무엇인가를 사고 소비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편하게 제공해 줄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은 좋다. 하지만 내가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 대신, 외부의 요소 때문에 사실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는 욕망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조절 당하는 것은 별로다.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실제로 내가 기분이 좋다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그러한 매커니즘에 익숙해진다면, 어느 순간에는 내 자신의 고유한 것 찾아내기와 애착이 희미해지고, 그냥 그저 그런 물결에 쉽게 왔다 갔다 하게 될지도 모른다. 노력하지 않으면 단순히 나이 들어가고, 휩쓸려 간다는 것은 사실상 지혜의 축적이라기보단 퇴화하는 것과 다름 없다.
언젠가 창의적인 사고를 할 때 일어나는 뇌 속에서의 변화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틀에 박힌 형식적인 일을 수행할 때가 아닌, 창의적인 일을 할 때, 뇌의 모든 부분이 속된 말로 불이 난다고. 서로 다양한 기능들이 한꺼번에,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려니, 두루두루 쓰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동티모르 시골 주민들의 일상적인 뇌는 한국의 보통 도시인의 그것보다 더 자주 스파크가 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