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디페렌테'(다른삶) 16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동티모르에 살다 보면 장례식 소식을 많이 듣는다. 생과 사야 어디나 있는 일이고, 여기라고 해서 더 많이 태어나고, 더 많이 죽는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때이른 죽음, 안타까운 죽음은 더 많다고 느낀다)
다만, 그 소식을 들을 일이 더 많다는 얘기! 한국에서라면 안 알리고, 모를 사이의 일들이, 여기서는 다 함께 치르는 일이다.
로스팔로스에 있을 때, 현지 직원분의 부친상이 있어 간 적이 있다. 문상을 드리고, 식사를 마칠 때쯤 되니,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도대체 가족이 얼만큼 오냐고 여쭈어 보니 대략 1,000명 쯤은 오신다고 한다. 전체 문상객 수가 아닌, '가족'만 그 정도란다. 친자녀들이 4명인가, 5명이고, 그 자녀분들의 자녀들, 즉 손자손녀들 및 그 자식들은 물론이고, 한국으로 치면 '사돈의 팔촌'까지가 다 가족에 포함이다. 걸어서 오는 사람들도 있고, 차 타고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있단다. 걸어서 오는 사람들을 보니 꼬꼬마 아기부터 나이가 꽤 있어 보이시는 분까지 다양하다. 워낙 자식을 많이 낳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말 이렇게 가족이 많냐고 여쭤보니 예를 들어 설명해주신다.
“만약 마나 진이 언니가 있다. 그 언니의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럼 마나 진도 가족과 함께 장례식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하신다. 언니의 시어머님이라고 하면, 사돈어르신일텐데... 사돈 어르신 장례식에 내 남편과 애들까지 데리고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허걱이다. 정말이지 그런 관계까지 다 챙기다 보면 1년 내 장례식 등 경조사 쫓아다니다가 다 보내겠다. 사실 그렇다. 여기 분들과 일 하다 보면, 맨날 무슨 장례식이 그렇게 많다!
생활 패턴을 보면 사실 자연스럽기도 하다. 한 마을 혹은 한 지역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살고, 직계 가족만 해도 꽤 많고, 사촌이나 육촌은 거의 직계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친밀하게 같은 공간에서 지낸다. 경조사를 서로서로 친밀하게 챙기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현지인 직원분들도 가끔씩 한숨 쉬면서 인정하신다, 챙겨야 할 경조사가 너무 많다고. 사회안정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계속된 식민지 경험으로 외부적으로 불안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가족들끼리의 연대가 남달리 강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든든한 닻이자 불안한 생활에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일테니. 그러나 그렇게 든든한 만큼,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와 역할은 많아지고, 내가 개인으로서 자유스럽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폭은 그만큼 더 줄어들 것이다. 이런 문화에서 태어나서 자란다면 그런 틀이 자연스럽게 인이 박히겠지만, 외부인으로서의 내가 느끼기엔 어떨땐 “too much”다. 공동체성과 가족이 주는 따뜻한 울타리가 좋아 보이는 정도보다는, 숨막힌다는 느낌의 정도가 조금 더 크다.
언젠간 그런 일도 있었다.
'지역여성 사회적기업 워크샵'을 수도 딜리에서 진행할 때였다. 23인승인 현지 시외버스 1대를 전용으로 예약을 했다. 23좌석을 다 쓰지 않더라도, 전 좌석을 다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스가 다 찰 때까지 몇 시간이고 시내를 도는 일이 허다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마을을 먼저 들러 우리 멤버인 아주머니들을 태우고 온 버스를 보니, 낯 모르는 얼굴이 보인다. 무슨 일인가 해서 S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한 분은 우리 멤버 아주머니의 여동생이란다. 떼어놓고 딜리 3박 4일을 가기엔 아직 너무 어린 아이가 있어서 이 아이를 봐줄 택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한 분은 그냥 마을 이웃 여자분인데 마침 딜리 갈 일이 있어 어찌어찌 하여 태운 것이라고 한다.
도시에서 자고 나란 개인적인 한국 젊은이 마인드로는 잘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다. “단체 워크샵, 그것도 8시간 걸리는 시외로 가는 단체 행사에 아이를 데려간다”는 상황은, 여기 문화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물론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매번 받는 “뜨어~”한 느낌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이 7~8명은 보통이고, 그러다 보니 항상 젖먹이들이 있다. 마을에서 교육이나 프로젝트 관련 모임을 할 때는 아주 당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엄마품에 안겨 나타나는 아이들이 항상 있고, 또 아주 자연스럽게 한참 교육이나 행사 중에 가슴을 내어 놓고 젖을 먹이는 풍경이 비일비재하다. 일견 낯설더라도 “아, 이게 당연한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3박 4일이라는 긴 일정에, 젖먹이 아이를 떼어놓고 갈 수 없으니 데려가되, 혼자서는 볼 수 없으니 여동생을 데려간다는 것은 현지 문화나 상황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울 수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충분히 따라가긴 하겠는데, 문제는, 도대체 왜 더 일찍 우리와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참가자가 아닌 군식구를 데려가는 것을 “사전 의논 내지는 하다못해 사전 통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8시간 거리 딜리 가는 것을 무척 어렵고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현지 시골 마을 부녀자들의 생활 무대는 태어난 마을과 주변 지역 정도이고, 남자들의 경우 일부 예외도 있지만 대다수의 주민들 생활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즉슨 평생을 가족, 친족 내지는 알만큼 아는 친밀한 관계의 소수 사람들과 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것, 네 것, 경쟁, 규칙, 원리원칙을 까다롭게 시시콜콜 따지지 않는다. 그런 개념이 희미하다. 아예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평생 얼굴 볼 사람들끼리 주로 어울려 살다 보니, 사람인 이상 실수하고 모자란 일, 서로 도울 일 들에 대해 같이 묻어주고 묻어가는 일이 자연스럽다는 이야기이다. 인간관계가 규범적, 인위적이지 않고 정에 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부분을 알고는 있지만, 이렇듯 너무도 당연하게 “가족이니깐, 이웃 사람이니깐” 그냥 쉽게 알아서들 호의를 베푸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 태어나면서부터 뼛속까지 '공동체/가족 기반'인 사람들과, 개인주의적 성향과 경험을 지닌 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깊다.
3~4살 정도 혹은 그보다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여자분들에게, “이 버스는 우리가 전용으로 임차한 거에요. 그러니 내리세요” 라고 매정하게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도 이렇게 버스 빌려서 딜리 갈 일이 있을텐데 확실히 정리를 하지 않으면 또 이런저런 사연들을 가진 가족이며 친구를 태워서 적선 아닌 적선을 할 수도 없고… 타자마자 머리가 아프다. 현지직원 J와 논의 한 후, 어쨌거나 탄 사람을 내리게 하는 것은 그렇고 딜리까지 같이 타고 가되, 우리가 애초에 계약한 우리 멤버 6명 및 직원 4명을 제외한 나머지 승객은 무조건 시장운임을 지불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다. 더불어 다음부터는 절대 사전 이야기 없이, 이렇게 당일날 “갑작스러운 결정”은 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다.
논리적으로는 이런 결정이 맞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럴 때면 항상 머리가 복잡하다. 우선 심정적으로 왠지 차가운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있고, 여기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관례를 어쨌거나 외부의 기준으로 “공정하게, 정확하게” 그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편한 심정도 있고… 하지만 동시에, “돈 많은 외국단체니 그 정도는 그냥” 이라는 사례들을 자꾸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있다.
어렵다.
딜리 숙소에 오후 3시가 좀 넘어 도착했다. 카드키로 문 여는 방법, 에어컨 키는 방법, 샤워기 쓰는 방법, 수세식 화장실 물 내리는 방법등을 간단히 아주머니들에게 알려드렸다. 나이가 가장 많으신 2분은 좌불안석이시다. 호텔방문을 자꾸 열어 놓아 달라고 하신다. 탁 트이고, 항상 옆집앞집과 맞닿아 있는 마을에서 계시다가 이런 “각자 개별 공간”에 들어와 있으니, 갑자기 탁 막힌 느낌이 드시는 게 어찌보면 당연할 터. 귀여우면서도 안쓰럽다.
작년인가 언제인가, 우리 한국인 직원들이 각자 사는 집을 임차해서 사는 것을 두고, 현지 직원분들이 “그러면 집에 가서 누구랑 이야기를 해요?”라고 걱정어린 어조로 물어보던 것이 생각난다. 아니, 그러니깐 저희는 그게 편하다는 거에요!라는 대답이 잘 와닿지 않겠지…
갸우뚱하고 낯설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어차피 인간 사회가 이상적으로 갈 수는 없어. 어떤 측면을 좀 더 보듬어 안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은 한 사회의 선택과 모양새! 결점은 있지만, 난 이쪽이 좀 더 옳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네!" 라고 느낄 때도 있다.
2015년 말, 우리 사무실 옆에 짓기 시작한 건물이 장애아동 시설이라고 K한테 들었다. 우리 사무실은 지역 도서관과 바로 붙어있고, 양 옆에 운동장을 둔 채로, 각각 지역 공립 중학교와 포르투갈 교사들이 가르치는 “시범학교” Escola Referência의 2개교가 붙어 있다. 이 학교 단지 내에 장애아동 시설을 짓는 모양이다. 마침 새로 짓는 건물 앞에 매끈하고 단이 높은 길을 내고 있길래 물어보니, 휠체어용 통로란다.
사무실로 돌아와 우리 현지 직원분들에게 장애아동용 시설을 짓고 있는데, 학교 안에 이런 시설이 들어오면 반대가 없겠느냐, 아저씨들 마을에 이런 시설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여쭤보니, 그게 뭐가 이상하냐며 갸웃거리신다. 그런 시설은 필요한 것이고, 들어온다면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지 라고 하신다.
한국에서는 장애인 시설은 “혐오”시설이고, 학부모들은 우리 “멀쩡한” 애가 장애인들과 섞이게 되는 것을 꺼려하고,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면 땅값이 떨어져서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아저씨들은 그런 시설은 많이 있는 것이 사회에 좋지 않냐고 하신다.
한국 사회가 지극히 당연한 수준의 인간성을 버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더 무서운 것은 그런 것을 이상한 것인 양, 인식조차 힘들게 하는 식으로 가는 것이 슬픈 순간이다. 더불어 티모르가 좋아지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