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디페렌테'(다른삶) 23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한국과 동티모르 간에는 직항기가 없다. (2021년 6월 현재 기준) 코비드 이전, 보통은 발리에서 동티모르 수도 딜리로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곤 했다. 동티모르에 처음 올 때도 발리 루트로 왔었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발리 공항에 내렸는데, 도착비자 줄의 앞뒤가 주욱 다 신혼부부들이다. 괜시리 '좀 부러운걸~'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로 뒤 커플때문에 냉정을? 되찾았다.
여 :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린, 혀짧은 애교가득 코맹맹이 소리로) "어빠, 여기 사람들 말 이상하지?"
남 : "그러게, 원달러 원달러 빨리 할라고 그런가? 돈 빨리 달라면 말도 빨라야지 ㅋ ㅋ ㅋ "
남여 사이좋게 : "아하하하하, 그런가봐"
여 : (조금 후 다시) "어빠, 여기 사람들 다 시꺼매. 무섭당~ 그치이~잉~?"
남 : "그니깐, 좀 지저분하지 않냐? 까만것도 아니고 하얀것도 아니고 좀 더럽게 생겼지?"
......
어차피 결혼이나 우정이나, 나름 배타적인 관계들은 각자의 "제눈의 안경" 이라지만, 그래서 각자가 편하고 맞는 사람들과 만나서 관계를 쌓아가는 것은 제각각의 선택과 자유이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사고 자체의 폭력성은 제쳐두고라도, 열린 공공장소에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매우 무심하게,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타자의 존재가치를 순식간에 깔아뭉개는 언어선택이라니. 왠지 무서우면서도 서글펐다. 끝까지 유사레퍼토리의 대화패턴을 계속하는 신혼부부를 피해서 어서 줄이 줄어들기만을 바랬던 기억이 난다.
동티모르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듯, 다른 폭력적 언어 (그리고 당연히 그 뒤에 숨어있는 폭력적 사고)를 대한 적이 있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한국으로 오려고들 기를 쓴단 말이야. 고용허가제 한국어시험 경쟁률이 얼마나 높은데. 또 다 고학력자가 많이 응시하는데, 동티모르는 거의가 고졸이지. 그런데 그나마 경쟁률도 안 높아. 대학 재학자나 대졸자가 공장 노동자로 가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는가 봐. 거참..."
대충 이렇게 기억한다, 그 분이 하셨던 말을.
듣기가 그랬다.
아니, 그건 우리나라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대학 나온 사람이나 고졸자나 다 노동자가 될 수 있고, 사실 좋은 사회라는 것은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하던간에 정직한 나의 노동의 가치를 물질적, 정신적 차원에서 인정해주는 사회일 것이다.
내가 특히 불편한데? 라고 느꼈던 부분은,
'동티모르보다 더 잘 사는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배운 애들도 서로서로 한국 오려고 난리인데 더 못사는 나라에서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애들만 관심있네? 여기 대학생이 뭐 대수라고 신청을 안해?' 라는 뉘앙스 때문.
직접적으로 대놓고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내가 오해를 했을 수도 있고, 또 조직원의 입장에서 조직의 일이나 실적에 신경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이 멘트를 하신 분은 당시의 '고용허가제 한국어 능력시험' 관계자) 하지만 '유독 동티모르만 고졸자 신청이 많다는 것이 이상하다, 자존심 때문인가'라고 말씀하시는 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딜리는 모르겠지만 로스팔로스같은 지방도시는 대학생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대학 자체가 많지 않다. 또 솔직히 한국의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이 가서 일하게 되는 공장이 대졸학력이 반드시 필요한 곳인가?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대학원졸업자들도 우리나라에 노동자로 오겠다고 난리인데…'라는 말에는, '고학력자도 노동자로 오고 싶어 난리인 우리나라는 잘 사는 나라'라는 이상한 우월감 같은 게 있지 않나?
사실 그 분은 그렇게 나쁘거나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적당히 열심히 일하고 적당히 예의도 바르신 그냥 보통 아저씨 인상이셨다. 한국에서 동티모르 노동자 분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고생이 많네.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가야지”라고 나름 격려의 말씀을 전하며 맛있는 거라도 사줄 것 같은 인상. 악랄한 방식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착한 분.
하지만 그런 “친절”속에 무심히 녹아있는 여러가지 전제들이 나는 불편하다.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으로서, 돈을 덜 가진 사람에 대해 자연스럽게 “너그러운 시혜자 내지는 윗사람”이 되는 것. 잘 사는 나라 왔으니 고생스럽더라도 (고맙게 알고), 열심히 돈 벌어가라는 것. 결국 계층과 신분과 생활, 나아가 삶의 목적이 모두 다 돈으로 귀결되는 논리. 그리고 그걸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돈 많은 나라, 불쌍한 동티모르르 도와준 좋은 나라 한국.
동티모르에서 만나 뵌 대사님 한 분도 비슷했다. 언젠가 한 번 로스팔로스에 방문하셨을 때, 우리 단체를 찾아 오셨다. 일장 연설을 하시고 가셨는데, 대충 논지가 다음과 같았다.
“상록수 부대를 자랑스럽게 여겨, 상록수 부대가 일했던 곳이나 사업과 연관을 시켜 일을 해야지 비로소 의미가 있다. 도서관 하나 운영하고, 여기 농부들 지원 하고 이런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과거 상록수 부대와의 연관성과 일관성 하에 일을 해나가야지, 한국에 기여를 할 수 있다.”
참고로, 내가 일했던 단체는 국방부나 외교부나 기타 정부나 지자체 부서가 아닌, NGO, 즉 "비정부기구"였다. NGO가 무엇인지 잘 모르셨던지, 아니면 외교관으로서의 신념과 애국심이 너무 넘치셔서 그러셨던 모양이다.
그 분은 동티모르 정부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티모르 애들도 한국 사람처럼 (이상하게 티모르 사람들은 꼭 '애들'이다, 한국 사람은 '사람'인데...) 부지런하게 일해서 돈 벌어와서 동티모르 발전에 기여 해야 한다.” 고 열심히 말하셨던 기억이 난다.
외교관으로서의 직업윤리와 사명은 분명 국익의 극대화와 자국의 위상 제고일테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외교관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직업에서나 어느 상황에서나 조직의 가치와 보편적 가치 기준이 충돌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대사님의 발언은 상대국 사람들의 존재가치와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나 고려가 하나도 없이, 그냥 한국을 보고 배우고 노력해야지 한국처럼 된다는 일차원적인 발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가치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자국을 최고의 선”으로 설정해 놓고 당연한 듯이 그것을 너나 나나 다 추구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는 것은 상당히 폭력적인 사고 방식으로 여겨졌다.
더 센 대사님도 계셨다. 그 분이 수도 딜리의 한 고등학교에 방문을 하셨던 적이 있다. 당시 그 학교에서 코이카 자원봉사자로 나와 있던 한국어 교사 (한국인)에게 당신의 말을 통역해 달라고 하셨다. 현지 학교의 고등학생들이 잔뜩 모여있었고, 대사님이 통역해 달라고 한 발언은 대충 다음과 같다.
"여기 있는 너네들 중, 월 2천 달러 벌고 싶은 사람, 손 들어봐. 너네 여기서 졸업해서 무슨 일 하면 월 2천불 벌 수 있겠니? 없어, 힘들어. 한국에서 취업하면 월 2천 달러 벌 수 있단다. 너네 공부 열심히 해서 한국 가서 열심히 일하면 월 2천 달러 벌 수 있어. 그러니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봐라. "
당시의 코이카 단원은, 감히?! 대사님에게 그런 발언은 통역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놓고 이야기했다.
"한국가서 취업해서 돈 많이 벌고 싶은 학생들도 있습니다만, 졸업하고 대학가고 싶은 친구들도 있고, 창업하고 싶은 친구들도 있고, 또 다른 다양한 꿈을 가진 친구들도 많습니다. 제가 그동안 한국어 교사로 친구들 가르치면서, 다양한 꿈을 듣고, 다양한 꿈들을 응원해줬는데, 그런 식으로 "한국취업하면 월 2천불!" 로 덮어 버리는 것은, 제가 그동안 해왔던 가르침과는 배치됩니다"라는 것이 그 발칙한?! 발언의 대충 요지. (멋집니다, CJ!)
이곳에서 만났던 대사님들이나 개발협력 관계자들에게 종종 느꼈던 관점과 태도 -한국은 이러이러하지. 그래서 잘 살고 발전한 거야. 그러니 당신들도 명심하고 노력하도록 해-는 매우 일방적이고, 단순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배제한 태도로 느껴진다. 동티모르가 분명 상대적으로 경제적 수준이 낮은 것도 맞고, 시간 개념이 느슨한 것도 맞고, 답답한 부분이 많은 것도 맞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만들어 온 많은 문제들을 해결 내지는 돌아보기 위해 보아야 할 부분들도 있다. 공동체 간의 유대감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관용이라든가, 서로간의 불편함을 함께 감수해주는 것, 함께 기다려주고 같이 가려고 하는 것들도 분명히 있다.
“한국이 이러이러해서 잘 살게 되었으니, 당신들도 따라하시오”라는 태도는, 분명 너무 단순하고 상당히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비민주적인 시각이다.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대사님들 모두, 사실 열심히 일하셨던 분이셨다. 교민들 대소사도 두루두루 챙기려고 하셨고, '한국의 위상 제고'와 양국의 각종 협력 프로젝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 대사관 소통창구는 항상 열려 있었으며, 교민들 민원에는 항상 신속하고 친절하게 응대해주셨다.
하지만, 조직의 가치를 바라보며 조직 안에서, 조직의 뜻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움직이셨다는 것. 그 안에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고민이나 예의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다보니 내 눈엔 꼰대로 비쳐 보였다. "라떼는 말야..." 는 개인의 무용담(을 빙자한 설교)일때도 있지만, 대개는 '조직과 나를 동일시 하는, 그래서 조직 내에서' 내가 얼마나 잘 났었는지, 내 덕에 조직이 이만큼 온 거야, 그러니 이만큼 최고야‘를 많이 깔고 있는 약간 서글픈 서사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