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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세계일주

마젤란, 두 제국 사이의 바다를 건넌 사람 02

by 마싸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jj0772/137



거센 바다와 반란

바다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태풍은 돛대를 부러뜨렸고, 항로는 미지의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먼저 산티아고호Santiago가 남아메리카에서 난파되었다. 다행히 선원은 대부분 구조되었지만, 배는 완전히 손실되었다.

남은 배는 4척.


선원들의 불만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1520년 파타고니아에서 겨울을 지내던 때였다. 식량과 날씨 문제로 고통받던 중, 일부 스페인 출신 함장들이 포르투갈인인 마젤란의 지휘권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Mutiny at Puerto San Julián)

마젤란은 냉혹하게 대처했다. 반란의 지도자들은 군법에 따라 교수형, 참수 등으로 처형했다. 타협은 없었다.

함대에는 공포와 질서가 동시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도 잠시뿐,

곧 산안토니오호San Antonio는 마젤란 해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기어코 스페인으로 돌아가 버렸다.

남은 배는 3척.


함대는 곧 미로 같은 해협으로 들어선다.

안개, 암초, 급류 때문에 지옥 같은 항해가 계속될 것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36일째!


"드넓은 새로운 바다다!!"


Discovery_of_the_Straits_of_Magellan_in_1520_(engraving_after_O.W._Brierly).jpg Discovery of the Straits of Magellan in 1520. by O.W. Brierly, Public domain, Wikimedia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는 장면을 묘사한 목판화/판화 스타일 삽화입니다. ‘발견’의 순간, 탐험가는 이 길을 통해 태평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고요하지만 섬도 대륙도 만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망망대해!


조용한 지옥, 태평양

함대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환희의 순간은 잠시뿐.

폭풍우 없는 잔잔한 바람과 맑은 날씨가 있는 평온한 바다Pacific 였으나 곧 다른 지옥이 펼쳐졌다. 3달 넘게 거의 아무 섬도 만나지 못한 채 항해가 이어진 것이었다.

괴혈병scurvy과 굶주림은 잔인했다.


"선원들은 쥐를 잡아먹고, 가죽 조각과 나무 톱밥으로 허기를 달랬다. 부서진 비스킷에서는 쥐 오줌 냄새가 풍겼다. 잇몸이 부풀어 올라, 이빨을 덮을 정도였다."

“We ate biscuit which was no longer biscuit, but powder swarming with worms. It stank of the urine of rats. We drank yellow water that had been putrid for many days. We also ate the hides that covered the mainyard, and even rats, which were sold for half a ducat each. Our gums swelled until they covered our teeth, so that we could not eat.”
(Pigafetta, First Voyage Around the World, ed. & trans. by J. A. Robertson, 1906, p. 85)



마젤란 원정에 참여한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이자 항해사 피가페타는(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 마젤란 원정에 참여한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이자 항해사) 떨리는 손으로 항해일지에 기록했다.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세계일주 첫 항해)


썩은 물, 썩은 음식, 죽은 선원들과 병든 선원들을 싣고 100일여 만에 함대는 필리핀에 도착한다. 원주민들은 평화롭고 친근했다. 그러나 세부Cebu의 추장과 동맹을 맺은 마젤란이, 경쟁관계인 막탄Mactan섬을 공격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무기를 가진 50명 남짓의 소수병력만 이끌고 막탄 섬에 상륙한 마젤란은 직접 전투에 나섰다. 현지 지형을 알지 못한 그는 진흙 사장에 발이 묶였고, 화살과 창이 쏟아졌다.

그의 마지막 전투였다.


"그는 우리가 모두 보트에 탔는지를 계속 확인했다... 원주민들이 창과 칼로 찔러 죽였다. 우리의 거울, 우리의 빛, 우리의 위안, 우리의 진정한 인도자인 그를."

“When our captain saw that, he stopped and turned back many times to see if we were all in the boats... But trying to draw his sword, he could not, because of a wound in his arm. The natives threw themselves upon him and ran him through with lances and swords, until they killed our mirror, our light, our comfort, and our true guide.”
(Pigafetta, First Voyage Around the World, p. 152)

항해사 피가페타는 감정을 담아 그의 마지막을 기록한다.

마젤란은 그렇게 생을 마쳤다.


최초의 세계일주

마젤란의 죽음 후, 지휘력 혼란 속에 유지가 어려워진 콘셉시온호Concepción는 결국 몰루카로 향하기 전, 1521년 말경 보르네오 근처에서 화재로 자침(스스로 불태워 침몰) 처리된다.

남은 배는 2척.


몰루카에서 수리를 한 뒤, 태평양을 거슬러 스페인으로 돌아가려 시도한 트리니다드호Trinidad는 포르투갈 함대에 포획되어 몰루카에서 압류되고, 선원 다수는 포로로 끌려간다.

남은 배는 이제 단 한 척.


몰루카 제도에서 향신료를 싣고, 인도양–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하여 스페인 귀환을 시도한 빅토리아호Victoria는 후안 세바스티앙 엘카노Juan Sebastián Elcano가 이끌었다.

혹독한 항해 끝에 1522년 9월 세비야로 귀환한 선원은 18명뿐.


1519년 9월 20일 5척의 배와 270명 출발,

1522년 9월 6일 1척의 배와 18명의 생존자 귀환.

-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로 기록.


생존자들은 영웅으로 환영받기도 했으나, 보상은 넉넉하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 국왕 카를 1세는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고, 원정이 가져온 경제적 이익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료에 따르면, 일부 선원들은 임금 체불 문제로 왕실에 청원서를 내야 했고, 엘카노조차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몰루카는 결국 포르투갈의 땅으로 인정되어 스페인의 실질적 이익은 줄어들었다.


결국, 스페인이 얻은 것은 지리적·과학적 성과였다. 태평양이 하나의 거대한 바다임이 확인되었고, 지구가 실제로 ‘항해 가능한 둥근 행성’ 임이 실증된 것이다. 이는 세계지도 제작과 항해 지식 축적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경제적 이익보다는 상징적-잠재적 승리가 컸던 셈이다.


a-chart-of-magellan-by-the-route-of-tierra-del-fuego-wdl3973-783e83-1024.png A Chart of Magellan by the Route of Tierra del Fuego, PICRYL, “public domain media”
남미 남단 통과, 마젤란 해협 근처를 묘사한 고지도입니다. 당시 스타일의 배와 대서양, 태평양 (Atlantic, Pacific)이라는 이름이 보이네요.


그렇다면 오늘날, 마젤란은 어떻게 기억될까?

포르투갈에서는 여전히 애매하다.

조국을 떠나 경쟁국 스페인의 깃발을 달았으니, 바스쿠 다 가마처럼 대놓고 기념하기는 어렵다. 리스본의 발견기념비에 그의 모습은 있지만, 다 가마의 위상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물론 요즘에는 '포르투갈이 낳았으나 세계가 공유하는 인물'로 조명하는 시도가 있다. 즉, 이제는 과거의 배신 논란보다는 '인류 유산'으로 보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마젤란–엘카노 원정을 스페인 제국의 대항해 업적으로 기억한다. 마젤란은 출발의 기획자, 엘카노는 완주의 실현자로 묶여서 기려지는 것이다. (마젤란 혼자가 아닌 엘카노와 한 쌍!)


세계 일주는 결국 마젤란 자신이 아닌, 살아남은 선원들이 완수한 것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 “마젤란이 의도적으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았던 것인가?” 혹은 그가 의도했던 탐험 목표가 과연 '세계 일주'였는가에 대한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처음에는 향신료 제도로 가는 서쪽 항로 개척이 목표였고, 세계 일주라는 개념은 후대의 평가나 기념에서 강조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또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탐험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제국주의의 확대, 폭력과 착취, 문화 파괴도 분명 존재한다. 그간 유럽 중심의 '발견/탐험' 프레임이 어떻게 기억되고 선전되었는지에 대한 고찰 역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마젤란이 알려진 바다의 끝을 넘어 길을 열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지나친 미화 혹은 지나친 부정의 해석 대신, 상상과 균형을 찾으며,

두 제국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제국보다 큰 바다를 건넌 항해가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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