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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도시, 근대의 시작

재난 속의 계몽 독재자, 마르케스 폼발 02

by 마싸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https://brunch.co.kr/@njj0772/145

1편에서 이어집니다.





교회와 귀족의 몰락

폼발이 가장 먼저 겨눈 적은 교회였다.

그는 예수회가 교육과 식민지를 통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전통과 신앙을 수호하는 예수회가, 폼발의 눈에는 진보를 막는 낡은 제도였다. 1759년, 그는 결국 예수회를 추방한다.


학교는 국가의 손에 들어왔고, 교육은 세속화되었다.

그는 코임브라 대학의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과학·수학·정치학을 강화했다.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세상을 움직인다.”


그의 개혁은 신학에서 과학으로, 신앙에서 합리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다음은 귀족.

폼발은 혈통보다 능력을, 명예보다 실리를 중시했다. 그는 귀족들의 특권을 해체하고, 상인과 관료를 새로운 중추 세력으로 세웠다. 포르투갈은 ‘귀족의 왕국’에서 ‘관료의 왕국’으로 변해갔다.



어두운 그림자

그의 시대는 화려했지만, 어두운 그림자 역시 있었다 - 폼발은 반대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1758년, 국왕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귀족 타바라 가문을 음모의 배후로 몬다. 조사는 철저했지만 공정하지 않았다.

고문, 재판, 공개 처형 — 모두 그가 명령했다.

귀족들의 피는 왕권 강화의 상징이자, 폼발 공포 정치의 서막이었다.

언론은 침묵했고, 비판적인 자들은 추방되었다.

그의 "계몽”은 자유로운 사유가 아닌 “통제된 질서”를 위한 계몽이었던 셈이다.


또한 그는 식민지 브라질에서 금·설탕·노예무역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게 했다. 겉으로는 ‘경제 개혁’이었지만, 실제로는 더 체계적인 착취 구조였다. 인간의 자유가 아닌, 국가의 부를 위한 근대화였다.


폼발 시대의 끝과 유산

1777년, 주제 1세가 사망하자 폼발의 시대도 끝났다.

새 왕비 마리아 1세는 그를 해임했고, 한때 모든 것을 지배했던 남자는 리스본 북쪽 폼발 영지로 유배되었다.

그는 말년의 5년을 침묵 속에 보냈다. 그리고 1782년 5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국왕도, 고위 성직자도 참석하지 않았다.


Lisboa,_Praça_do_Marquês_de_Pombal_(4).jpg Palickap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리스본 폼발 광장. 리스본 중심부에 있습니다. 큰 원형 교차로 한가운데 있는 폼발 동상이죠. 전통적으로 '용기'와 '통치력'을 상징하는 사자상을 붙잡고 있습니다. 동상은 남쪽 리스본 중심부(바이샤)를 향해 서 있는데, 이는 마치 '자신이 재건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리스본은 여전히 그의 도시였다.

오늘날 리스본의 중심가 바이샤(Baixa)에 서면, 직선으로 뻗은 거리와 균형 잡힌 건물들, 그리고 마르케스 드 폼발 광장의 거대한 동상이 도시를 내려다본다.


폼발의 유산은 단순한 재건이 아니다.

그의 시대는 ‘신이 만든 세계’에서 ‘인간이 설계한 세계’로의 전환점이었다.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은 포르투갈 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신의 섭리는 완전한가?”라는 근대적 의문을 던졌다.

폼발은 그 질문에 행동으로 답했다.


“신은 무너뜨렸지만, 인간은 다시 세운다.”


그의 냉정함은 무자비함으로 남았고, 그의 이성은 때로 잔혹함으로 변했다. 그러나 재난 이후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고, 교회의 권력과 귀족의 부패를 걷어내고, 국가를 이성의 질서로 조직한 인물로서 그는 여전히 근대 포르투갈의 기점으로 기억된다.




역사 속에서

가이올라 공법Gaiola pombalina

'Gaiola’는 포르투갈어로 새장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새장이 나무 막대들이 엇갈리며 사방으로 얽혀 있잖아요?

리스본의 새 건물 내부 구조도 딱 그랬습니다.

목재 기둥과 가로대가 십자형으로 교차된 “격자형 뼈대 구조”를 만들고, 그 위에 벽과 천장을 덧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물 속에 새장 하나가 들어 있는 것 같다”며 그렇게 부르게 된 거지요.

1755년 대지진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라, 진도 8.5 이상(으로 추정), 쓰나미와 화재까지 동반한 3중 재앙이었죠. 폼발은 도시를 “다시 무너지지 않는 도시”로 만들고자 결심합니다. 장교, 건축가, 기술자들을 불러 나온 결과가 바로 ‘Pombaline Lisbon’ — 오늘날 바이샤 지역의 바둑판 모양 거리와 내진 구조물들입니다.

Exemplo_da_gaiola_pombalina_na_cobertura_do_palacete_que_alberga_o_Museu_do_Vidro.jpg Threeohsix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Exemplo da gaiola pombalina na cobertura do palacete que alberga o Museu do Vidro
실제 벽면 내부의 가이올라 (나무 격자 - 새장 구조) 구조를 보여줍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 건물은 돌벽과 석회로만 세워졌습니다. 돌벽은 지진의 흔들림을 받으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죠. 그래서 폼발과 기술자들은 “탄성 있는 나무 구조”를 도입합니다. 내부 나무 골조는 벽 안쪽에 십자형 나무틀(가이올라)을 넣어 벽체 전체가 “휘어질 수 있게” 만든 거죠. 즉, 진동을 받으면 뻣뻣하게 깨지는 대신, 살짝 휘며 충격을 흡수합니다.

한 돌 대신 벽돌+모래+석회+나무 섞은 가벼운 충전재를 써서 무게를 줄입니다. 그리고 모든 건물의 층수와 거리 폭을 통일해 무게중심이 고르게 작용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유럽판 목구조 내진 설계”였던 셈이지요.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폼발은 새 구조물이 얼마나 버틸지 실험하기 위해 포르투갈 군인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 나무 구조물 주위를 행진하라. 발을 맞춰 흔들어라.”

즉, 병사들이 군악에 맞춰 걷게 해서 진동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건물이 흔들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테스트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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