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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Dec 14. 2023

설산이 좋다

겨울이다.

고구마의 구수한 계절이고 벽난로의 매콤한 계절이고 어묵국물의 얼큰한 계절이다. 불이 그리운 계절이다.


얼음과 빙수와 썰매와 설피가 생각나는 차갑고 하얀 계절, 물의 계절이다. 겨울은 음양오행으로도 물에 속한다. 상선약수라 했듯이 가장 낮은 데서 모든 것을 품을 줄 아는 어머니 같은 물. 물은 경계가 없다. 비린 강물이었다가 밍밍한 얼음이었다가 위로 올라 솜사탕 구름이 된다. 군자불기라,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넓고 둥근 냄새를 가지고 있다. 지금을 통섭의 시대, 네트워크의 시대, 무경계의 시대라 하지만 일찍이 물은 이들을 묵묵히 섭렵한 존재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눈과 얼음을 좋아한다. 흐르는 물이나 움직이는 구름도 좋지만 아름다운 육각형의 눈이 되어 영원처럼 잠들어있는 얼음,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 단단하고 환한 침묵의 세계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산이 좋다. 세계배낭여행을 하면서도 유난히 설산에 많이 빠졌다. 묘한 빙하의 냄새가 나를 자석처럼 이끌었다.   

  

네팔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길에는 대지의 어머니라는 뜻의 초모랑모 즉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수많은 설산이 나를 반긴다. 언덕마다 펄럭이는 오색깃발이 풍장을 하다 남은 썩은 냄새를 바람에 실려 보낸다. 그 길에서 며칠, 몇 달을 무릎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 오체투지를 하는 중생들, 그들의 땀냄새가 야크젖으로 만드는 버터티 냄새와 맞물려 코를 지릿하게 한다. 포카라성의 벗겨진 단청냄새는 묵은지 오래다.


멀리 킬리만자로의 설산을 어떤가. 죽은 표범냄새를 맡으러 올랐다가 고산증에 한방 맞고 하산하던 길, 곳곳에 쌓인 토사물의 역한 내음, 지나는 포터들의 짙은 숨냄새가 설산과의 거리를 더 벌려 놓았다.

뒹구는 화산재를 딛고 하염없이 오르던 후지산은 어떤가. 두 걸음 오르면 한 걸음 미끄러지는 먼지에서 폴폴거리는 용암냄새가 스멀댄다. 나무 하나 없고 건네다 보이는 산 하나 없는 그곳은 메아리 하나 생기지 않는 초밥 같은 외로운 냄새만 고여있을 뿐이었다.


황량한 들판에 군데군데 거무스레한 나무들만 떨고 있는 남미의 파타고니아. 구름 속에 사라진 토레스델파이네. 그 발목이 잠긴 호수로부터 진눈깨비 속에 실려오는 비릿한 물고기냄새. 몇 덩이씩 떠 나니는 푸른빛의 빙하에서 나는 침묵의 소리가 아직 내 파타고니아 재킷지퍼에 묻어있다.

중국대륙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옥룡설산. 호도협의 거센 물살이 실어 나르는 황토냄새는 향수처럼 반가웠다. 다만 허름한 식당의 이름 모를 메뉴판에서 나오는 향채냄새는 고산증만큼이나 역했다.


흰 모자를 쓰고 앉은 돌로미테, 그 기암절벽 밑 푸른 초원 위에 핀 야생화 내음은 또 어떤가. 치즈와 우유가 섞인 모차르트 같은 향기는 달콤했다.

일 년의 반이 얼음으로 뒤덮이는 아이슬란드. 물과 불이 상생하고 있는 그 화산지대에서 올라오는 지구의 허파냄새, 블루라군의 하얀 진흙사이에 배어있는 암모니아 냄새는 지구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설산은 모두 높은 데 있다. 태양이란 불과 가까운 곳에 있는데 왜 그리 차가울까.

공기로 가득한 하늘에 닿아있는데 왜 그리 숨이 찰까. 티베트 고산지역이나 남미 잉카의 안데스에 가면 어린아이들이 손에 들고 팔러 나오는 게 있다. 바로 화석이다. 암모나이트나 물고기가 찍혀있는 조그만 돌, 예전에 이곳이 바다였다는 얘기이다. 어느 순간 대륙판이 서로 싸우면서 충돌한 순간 하늘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래서 숨이 찬 것인가. 이곳이 바닷속이어서. 그래서 차가운 것일까. 깊은 바다 속이었어서.


가장 낮은 곳이었다가 가장 높은 곳이 된 존재, 인내와 아픔과 성취를 동시에 안고 있는 장엄한 존재이다.

거칠지만 숭고한 삶과 닮아있는 설산은 겨울을 뜻하는 물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래서 설산이 좋다. 아니 하얀 겨울이 좋다.

어디선가 바다냄새가 난다. 오늘은 벽난로에 생선이나 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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