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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Mar 12. 2024

하얀 정자

나만의 장소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부러운 장면이 있다. 드넓은 공원의 잔디, 거기에 누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한가하게 와인 한잔을 하는 모습. 여유와 낭만이 흐르는 공간, 둘이건 혼자건 그 햇살이 참 부드러웠다.      

여러 번의 이사 끝에 정착한 곳은 결국 공원이 한걸음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꽃이 피면 피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넓고 한가한 공기가 좋은 숲. 거기에는 조그만 육각정이 하나 있다. 혼자 앉기엔 좀 허전하지만 몇 명이 모이면 아늑한, 나의 최애장소인 그곳엔 여러 겹의 소리가 켜켜이 들려온다. 


우선 대금소리. 한적한 곳에 위치하기에 소리가 좀 울려도 걱정이 없다. 제대로 나지 않는 소리와 씨름하려면 이만한데도 없다. 물론 주로 집에서 방문을 닫고 연습을 하지만 아내의 눈초리에 예리한 입김이 흐트러질 때가 많다. 부족한 소리라도 간혹 지나가는 사람이 멀리서 잠깐 서서 듣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다음은 시 낭독, 시창작반 몇 이서 각자의 시를 들고 와 읊는다. 서로 격려해 주고 다듬어주기도 한다. 즉석 백일장이 열리면 새로운 단어 하나 주으려 공원을 몇 바퀴씩 돌기도 한다.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각자의 시상이 바스락거리는 즐거움이 있다.      

한쪽에서 조용하지만 일필휘지 하는 소리가 난다. 현대서예반이 계절만 바뀌면 이곳에서 야외학습을 한다. 넓은 바닥에 두터운 면깔개를 깔고 그 위에서 멋들어진 글씨를 써내려 가는 것이다. 정자 탁자에는 가벼운 음료와 술이 대령하고 있다. 각자 생각한 글씨를 큰 전지에 휘갈기고 나면 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글의 숨은 뜻이 해설된다. 이어 막걸리 한 사발이 건네지고 한 건 했다는 만족감이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시간.     

다음은 판소리의 시간. 네다섯명의 소리꾼이 모여 앉아 단가라도 한 대목 부를라치면 제법 소리가 멀리 퍼진다. 물론 연습할 때는 노래방을 빌려하기도 하지만 계절이 좋을 땐 이 숲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작은북을 가져와 가볍게 두드리며 돌아가면서 한 소절씩 부르는 맛이란. 한 번은 우리 소리가 컸던지 민원이 들어왔다. 학교 다닐 때 생활주임에게 들키듯 서로 킥킥거리며 자리를 옮겨 다닐 땐 모두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아내와 호젓이 걷을 땐 아늑한 벤치가 되고 혼자 명상을 할 땐 절간의 마루가 되는 곳.  우듬지에 찔린 하늘은 단색화로 복잡한 머리를 비워주고, 정자의 처마는 마음의 거리를 한 움큼 좁혀준다. 앉아있으면 저쪽에 앉은 소리꾼의 추임새가 들리고, 애달픈 시의 운율이 흐르며 서걱거리는 글씨소리가 들린다. 그때 함께하던 나무 위의 새들이 다가와 하나하나의 기억을 뿌려놓는다. 

이제 세계여행에서 보았던 공원의 그 장면이 더 이상 부럽지 않다. 물감은 여러 가지 색을 섞으면 검게 되지만 빛은 여러 빛을 더하면 하얗게 된다. 여러 벗들과 화제들이 무지개 빛처럼 쌓인 나만의 정자. 거기에 앉으면 그만 마음이 하얘지는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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