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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May 26. 2024

2G 친구

그는 말이 없다.

생각이 말로 반죽이 되려면 가슴에서 목까지 30분, 목에서 입까지 20분쯤 걸린다. 드디어 한소끔 말이 끓어오르면 숨을 크게 쉬고 입술을 몇 번 여닫아야 된다. 마침내 말을 뱉으려는 순간 화제는 이미 다른 데로 넘어 있다. 그는 그저 놓친 버스 바라보는 것처럼 넋을 잃고 다른 사람의 입을 쳐다볼 뿐이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지쳐 잦아들 무렵 소처럼 되새김하고 있던 그의 말이 샛눈을 뜨고 꾸역꾸역 삐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장자의 말이고 철학자의 시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리기 바쁘다.


사실 난 그가 예전에 무엇을 했는지 무슨 공부가 그를 키웠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아직도 2G 핸드폰을 쓰고 있으며 그와 연락하려고 메시지를 보내면 이틀쯤 지나야 수신확인이 되는 정도이다. 전화도 열 번 걸면 그중에 한번 접속이 가능할까 말까이다. 차라리 편지나 엽서로 연락하는 편이 훨씬 빠르겠다 싶을 정도이다.

그렇게 무던한 그가 인간의 삶에 대한 어떤 주제에 대해 어렵게 일갈을 하면 그 크기와 무게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노장자의 말이 드나들다 까뮈의 이방인이 튀어나오고 연극 에쿠스에 나오는 말과의 대사를 읊조린다. 경계가 없고 막힘이 없다. 막걸리 한두병 치우는 사이에 동서양의 문학과 예술 마당이 한껏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다. 삶의 길은 그렇게 박식하면서 만남의 장소는 통 못 찾는 것이다. 심한 길치이다. 말의 방향은 잘 잡으면서 길에 대한 감각이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결국은 찾아오지만 웬만한 인내심 아니고는 기다리기 힘들다. 어쨌든 나는 그런 친구를 가졌다. 말씨와 길눈은 어눌하지만 생각의 은 드넓기만 한 친구. 나도 2G로 바꿔보면 그런 능력이 나올까나. 며칠을 핸드폰을 켜지 않고도 저리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잠깐만 핸드폰이 손을 놓고 있어도 불안해하는 나. 저런 천연기념물 같은 양반을 내가 감히 어찌 흉내 낼 수 있으랴. 별장을 갖지 말고 별장을 가진 친구를 가지라는 말이 있다. 나도 저런 낡고 멋진 별장지기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부자가 아닐까.

오늘도 그에게 메시지 하나를 띄워본다. 사흘 안에 답장이라도 오면 웬 횡재인가 놀랄 준비를 하면서. 어서 만나 그의 깊이를 재어보고 싶은 저녁.

한마디를 만들어내기 위해 몇 번이나 입술을 갈아대는 그의 부지런하고 진지한 모습이 벌써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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