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였다.
전공에는 관심 없고 취미동아리인 연극반에 매달려 무대에서 밤샘하기 일쑤였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지루해질 즈음 회식자리가 있었다. 단 이틀 공연을 위해 두 달을 이렇게 매일 연습해야 하느냐 하고 투덜거리는 나에게 술이 거나한 연극반 선배가 지나가듯이 뱉었다. “연극은 연습이라도 있지만 인생엔 연습이 없다.”
그날 난데없이 받은 화두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데모로 인해 학교는 휴교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어느덧 3학년이 되었다. 이대로 흘러갈 것인가. 내가 탄 배는 어디에 도착할 것인가. 연습이 없는 이 젊은 시간이 마냥 흐르는 것이 안타까워졌다. 쏜살같이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다. 이렇게는 안된다. 생각을 해보자. 내 10년 후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번쩍 지난번 과사무실에서 나눠준 졸업선배들의 명단이 생각났다. 그래, 내 10년 후라면 10년 전의 선배의 지금 모습일 것 아니냐. 그럼 그 선배를 만나보면 미래의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동료학생을 모았다. 그렇게 우리는 10년 전 선배 순방 둘레길에 올랐다. 목표 선배 10명을 잡고 10명의 친구들이 선배회사를 찾아다녔다. 좋은 소리, 쓴소리가 바람에 날려갈까 모두 쓸어 담았다. 순방 후에 선배들의 조언을 나름대로 요약해 보니 3가지였다. 그때부터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내 전공은 나의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권유로 들어간 학과였다. 결국 졸업 후 그 3가지 중의 하나인 특수대학원에 입학하는 목표를 이루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공부를 하다가 새로운 길이 보여 나의 평생 진로가 바뀌게 된다.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기진폭에 따라 하루아침에 수없는 목숨이 날아가는 현실이었다. 당시 나는 누가 보기에도 자신 있고 그런대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는 일, 나의 중년 이후의 삶은 어떨까. 그때 다시 한번 그 한 마디가 머리를 쳤다. ‘연습 없는 인생’. 그래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10년 후를 생각해야지. 결국 주경야독을 시작했다. 아이들 등교를 시키고 생기는 껌같이 얇은 시간에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무슨 공부냐고 닦달하는 상사 세명을 갈아치우면서 새로운 학위를 따냈다. 결국 그것이 인생의 2막을 여는 디딤돌이 되었다.
연습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내일을 위한 준비에만 쓰이지 않았다. 지금 현재 이 순간 하나하나가 연습이 아니고 실제 공연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세계여행을 다녀도 저녁 8시가 되었는데 아직 잘 자리를 준비하지 않은 적도 많았다. 오기 힘든 곳이니 한 곳이라도 더 가서 보고 그 근처에서 잠자리를 찾아보자는 식이었다. 그 때문에 아내의 잔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덕분에 그때 아니면 못 볼 곳을 아주 맛있게 찾아 먹곤 했다.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을 여행가방 꾸리듯이 빈 공간 없이 채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지금이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최애영화 원더풀라이프에서처럼 나중에 죽어 인생에서 꼭 한 장면만 꼽으라 하면 오늘, 지금, 여기, 이 장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만약에라는 가정법은 통하지 않는다. 프로와 아마튜어, 똑 같이 실수한다. 그러나 프로가 다른 점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 인생엔 연습이 없다. 오픈런 공연 중이다. 관객은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아니면 나 혼자일 수도 있다. 자, 오늘도 일출이라는 조명이 켜졌다. 무대는 여기다. 밤새 인터미션이 끝났다. 공연 시작이다. 3막 2장 막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