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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Jan 17. 2024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자

언젠가부터 아내의 잔소리가 심해졌다.

온갖 고민 끝에 그 잔소리를 다르게 해석하기로 했다. 추임새라고 생각하자고. 판소리꾼에게 응원을 넣기 위해 중간중간에 넣는 소리, 그것이라고. 그 뒤부터 무언가 잔소리를 하면 ‘얼씨구’ 하는 응원의 소리로 들었다. 그랬더니 예전보다 받아들이는 스트레스가 한결 적었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잇몸이 몇 개 상한 뒤로 술을 적게 먹으라는 잔소리, 안압이 높아져 눈약을 넣기 시작하자 노트북에 그만 붙어 있으라는 잔소리들이 사실은 아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철들자 노망이라고, 남자들은 누구나 아는 평범한 상식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는 종족인가 보다. 내 몸에 대한 사랑은 나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이불을 걷어차는 남편의 배를 살며시 덮어주는 것은 닥쳐올 감기를 미리 막아주는 것이고, 생선의 가시를 발라주는 것은 성미 급한 남편에게 생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기억하고 쇼핑에서 제외하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기억하여 블루투스로 켜주는 것도 관심의 연장선일 것이다.


내 어머니의 기억 중 하나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하신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돌아봐도 어머니는 거기에 서 있었다. 들어가라고 몇 번이나 손짓을 해도 여전히 망부석처럼 서 계신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몸이라는 언어로 전해주셨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그랬다 한다. 시골에서 무지렁이 고향친구가 찾아오면 그 바쁜 와중에도 백악관을 손수 구경시켜 주고 정문 앞까지 직접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를 만나고 온 친구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더 귀한 자신의 존재감을 얻어가지고 오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부부끼리도 의견이 다르면 싸우는 편이 낫다고 한다. 가장 안 좋은 것이 무관심이라는 것. 그것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 있어도 거기에 없는 투명인간으로 여기는 자세이다. 불가에서 좌선을 할 때 쓰이는 말, '내가 없는데 내 것이 있겠는가' 하는 등의 법어가 아니다.  


아내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반갑다. 나에게 무관심하지 않아서. 나를 있으나마나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나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 주어서. 나의 앞날을 걱정해 주어서. 그동안 친구들 앞에서 ‘난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아.’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그만큼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실토한 것 아닌가. 내일부터는 무언가 꼬투리를 찾아봐야겠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수집해야겠다. 그런데 내 잔소리에 아내가 답답해하면 어떻게 하지?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득시키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씩씩대며 화를 내면 어쩌지?  잔소리 작전은 고려해 봐?  그러면 이제 어쩌지? 아내에게 관심이 없냐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냐고 하면 어쩌지? 작은 잔소리라도 시작해 봐?


"여보 화장실 불 켜져 있네?"  

아내가 그럴리 없다며 돌아본다.

'훗,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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