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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Mar 02. 2024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가

매캐한 냄새가 창틈으로 여지없이 스며든다. 

앞은 짙은 안개가 중앙선을 지워버려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이 로드킬처럼 튀어나온다. 사실 무대의 막처럼 가려있는 시야는 안개가 아니었다. 연기였다. 

며칠간 계속되는 캘리포니아 산맥의 산불. 우리는 겁도 없이 그 속에 갇히게 되었다. 냄새뿐 아니라 열기도 후끈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빠져나가야 한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목이 타고 얼굴이 굳었다. 옆에서 지도를 보고 있는 아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 달렸을까. 사투 끝에 질긴 산불의 손목을 겨우 뿌리칠 수 있었다. 근처 한산한 마을의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냉커피부터 시켰다. 멀리 산불연기와 그 속에 날름거리는 발간 혓바닥이 보인다. 어른거리는 그곳을 향해 앉아 심장의 펌프질이 잦아들 때까지 초점을 잃고 앉아있어야 했다. 우리는 무작정 여행을 떠났고 지금 우리는 이런 뜻하지 않은 상황을 무작정 만나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떠올랐다. 단계. 그가 노벨문학상을 탄 유리알유희라는 작품 속에 나오는 시의 제목이다. 젊은 시절부터 외웠던 문장이 아직 나의 뇌리를 맴돌고 발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하듯이 일생의 모든 시기와 지혜와 덕망도 그때그때에 꽃이 피는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첫 문장.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일갈이다. 

‘생의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은 용감히 서러워하지 않고 새로이 다른 속박으로 들어가듯이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 한다.’ 나의 젊은 시절 이 글귀는 나에게 앉은자리를 박차고 미지의 세계로 도전하게 한 문구였다. 알다시피 방랑시인 헤세만큼 여행을 좋아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행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을 넘어 정신적 큰 산을 넘어가야 만날 수 있는 철학적인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이 시의 하이라이트 문장, 술자리마다 일어서서 박인환의 시만큼이나 읊어댔던 구절,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습관의 마비작용에서 벗어나리라.’ 우리 생활권에 뿌리를 박고 들어살면 탄력을 잃기 쉽다는 그. 새로운 길을 가려할 때는 처음에 이상한 힘이 깃들어있고, 그것이 우리를 지키며 넓혀준다는 그의 신념. 동서양의 사상을 섭렵한 그가 물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신의 자유를 주장한 그의 작품에서 설파한 구절이다. 습관과 마비작용을 한 축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과감히 타파하는 자만이 진정 여행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멀리 이스터섬으로, 남도 강진으로, 도서관 책 속으로, 영화로, 만남으로 그리고 글쓰기로. 습관에 마비되기 전에 한 단계, 한 단계 그 이상한 힘에 이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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