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제단의 여인
지난 겨울 오랜만에 산을 올랐다.
강원도 중에서도 깊숙이 자리한 태백산.
눈이 엄청 오던 날이었다. 발이 무릎까지 빠지고 미끄러지면서도 올랐다.
드디어 정상에 이르렀다.
둥그런 천제단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두세 명 기다리고 있었다. 천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곳. 예전에 비해 정리가 좀 된 것이 달라져 보였지만 구조는 같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원을 하며 절을 하고 나온다. 내 앞에 한 여인이 한참이나 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닥치는 기시감. 맞다. 그 보살님 아닌가 하여 그녀가 돌아설 때를 기다린다.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설마 그 보살님은 아니겠지. 시간은 순식간에 40년 전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힘들게 산을 올라와 천제단 옆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 다. 평일이라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왕 오른 것, 제단에 들어가 기도나 한번 하고 갈까 했는데 안에 인기척이 있다.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궁금하기도 해서 기다리는 데 한번 들어간 사람이 영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나도 모르게 졸음이 쳐들어왔다. 가면 상태에서 나의 측은한 모습이 보였다.
여기 올라와 궁상을 떨고 있는 이 젊은이는 대체 누구인가. 지난주 회사의 인사 발표가 있었다.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능력도 인정받고 있는 터라 이번 인사에서 내가 누락되리라곤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이번 기에 승진할 동료들 전체가 밀린 것이다. 회사 전체의 업적 때문으로 지난 기수 누락된 몇 명만 승진이 해당됐을 뿐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다 안 돼도 나는 될 것이라고, 아니 돼야 한다고 믿고 싶었다. 바로 위의 상사와 말로 일전을 치른 뒤 조퇴하여 집으로 왔다. 집 앞에서 혼자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들어오니 퇴근한 아내가 묻는다. 아무 얘기 없이 짐을 쌌다. 아내가 깜짝 놀라 했다. 짐이라야 배낭 하나에 옷가 지 두세 벌이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 놀란 아내는 집앞까지 따라 나왔다. 다녀와서 얘기하겠노라 아내를 돌려세우고 무작정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전국의 도시가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구석에 처박혀 눈에 안 띄는 도시를 찾았다. 태백이었다. 처음 가 보는 도시. 탄광촌. 아이들이 아빠를 그려오라 하면 모두 검게 그려온다는 광산도시. 몇십 구비의 산을 넘고 넘어 허름한 여관에 몸을 던졌다. 옆의 막걸리집에서 울려오는 니나노 노랫 소리를 베고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걸어 이곳을 올라온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 나 자신이 초라해 보여서?
한참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안에서 절을 하던 사람이 나온다. 옷을 보니 보살복을 입은 사오십 대의 아주머니였다. 어색하게 눈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 자리에서 저리 오래토록 비셨나 궁금 하기도 했다. 안을 간단히 둘러보고 나오니 보살님이 저만치 앉아 발아래 펼쳐진 능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 밑의 절에 가는 길도 물을 겸 다가가 인사를 다시 했다. 밑의 절에서 오신 거냐고 물으니 맞단다. 궁금하기도 해서 몇 마디 묻다보니 본인의 얘기가 새어 나왔다.
보살 본인은 결혼한 지 20년차 되는 데 지난 해 여기 온 뒤로 두 번 째란다. 당시 남편은 사업에 실패한 뒤로 술에 쩔어 살기 시작하고 심지어 수시로 손찌검까지 해 댔다고 했다. 그때 무작정 집을 나와 발길 닿는대로 온 데가 여기라는 것이다. 그때 밑의 절에 머무르면서 매일 천제단에 올라 기도를 들인 것이다. 그리고 며칠 만에 집에 갔는데 남편이 몰라보게 바뀌어 있더라는 것이다. 갑자기 친절해지고 사람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 보살은 천제단의 기도가 효험을 봤다고 믿고 남편에게 그 사실을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올해는 남편이 앞장서서 집안이 잘 풀리도록 기도를 해보라고 보살님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작년처럼 절을 하는데 그렇게 기분이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겁고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작년과는 달리 감사와 기쁨으로 절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었다. 발아래 능선이 저만치 보이고 자지레한 군상들이 부질 없어 보이는 태백산 정상에서의 만남이었다.
보살님을 내려보내고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의 고민은 무엇이었나. 과연 저 보살님의 아픔과 삶에 감히 견줄 수 있는 것인가.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방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승진 한번 안 된 것 때문에...... 그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아내에게 얘기도 없이 가출을 하고.... 희랍의 어느 철학자가 그랬나. 무엇인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얘기했다지. 동전 한 닢을 꺼내 한 쪽 눈을 감고 다른 쪽 눈을 동전으로 가려보라고. 그러고는 태양을 보라고. 그리고 동전이 크냐 태양이 크냐고 물었다지. 말이 안 되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지금 그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더니 불쑥 회사의 부원이나 아내에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누가 볼까 하여 주위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래 동전을 던져 버리자. 태양같이 멀리 보자.
나는 벌떡 일어나 그 힘들게 올라간 산을 단숨에 내려왔다. 그러고는 집으로 오는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회사에 나가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상사의 반가운 눈짓을 가볍게 받으며 늘 그렇게 했듯이 회의실로 발을 옮겼다.
내 앞에서 절을 하던 나온 여인이 제단을 돌아 나왔다. 역시 그 보살님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인의 넉넉한 모습과 늘어진 머리카락이 왠지 당시 보살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듯이 빠져나가는 모습에 대고 나 혼자만 아는 가벼운 목례를 한다. 당신이 보살이고 누구나 보살이라고. 딱히 아무런 말씀을 안 했어도 그 모습 자체가, 당신의 삶이 곧 위로이며 위안이라는 것을.
그때와는 달리 하얀 눈으로 덮인 태백산. 젊은 시절의 패기도 치기도 모두 하얀 기억 속으로 덮어버린 설산. 그 산에 다시 올랐었다. 지난겨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