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후회하지 않을 3가지 길

by 걸침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각각의 길은 모양도 다르고 속도도 다르다.

니체가 말한 인생의 3단계 설의 다른 해석본이다. 먼저 생계를 위해 낙타같이 일하는 기간이며 ‘You should’로 표현될 책임과 의무의 시간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I will’, 자신의 욕망을 채워가는 사자 같은 단계이다. 그러나 맨 마지막은 순수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I am as I am’의 단계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일터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제대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거리에서 신문을 팔아보는 것이다. 지금은 신문팔이 소년이 없이 스마트폰으로 모든 뉴스가 대체되었지만 당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똑같이 50부의 신문을 가지고 나섰는데 한 친구는 몇 시간이 되어도 허덕이고 있는데 한 친구는 금세 다 팔고 오는 것이다. 신문사 영업부장이 신기해서 그 뒤를 밟아 보았다. 한 친구는 보통의 친구처럼 팔고 있었다.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그 사람의 길을 막아선다. 그리고 ‘신문 사세요’라고 외친다. 열에 아홉은 귀찮은 듯 피해서 빠져나간다. 그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친구는 달랐다. 저 쪽에서 한 사람이 다가온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멋진 신사분이면 A신문을 위로 올려놓는다. 헤드라인이 ‘북한 핵보유 어디까지인가’이다. 아주머니가 다가오면 B신문을 위로 올려놓는다. ‘올해 물가 심상치 않다’의 기사가 잘 보이게 놓는다. 그러고는 그 사람의 진행방향을 가로막지 않고 같이 걸어간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헤드라인이 잘 보이게 하고는 수 미터를 같이 걷는 것이다. 고객 스스로가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길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주는 것이다.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다른 친구처럼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욕구를 건드려야 고객의 주머니가 열린다는 것을 아는 친구이다. 그랬다. 내가 했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직업이 바로 그랬다. 한시라도 그 철칙을 잊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패를 맛보곤 했다. 나를 아는 만큼 상대의 심리를 알아가는 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곧 생계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 왔다.


둘째는 새벽길이다. 이 길을 가려면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어야 한다. 어느 고을 부잣집에 일꾼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주인은 많은 일꾼 중에 한 놈을 유난히 아꼈다. 다른 일꾼은 하루종일 일하기 바쁜데 이 놈은 하루 종일 산에 올라가 뒹굴뒹굴 놀다가 내려오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인은 아무 소리 안 하는 것이다. 다른 하인의 시샘이 극에 달했을 때다. 문제의 하인이 주인에게 한 마디를 건넨다. 시중에 있는 나막신을 죄다 거둬들이라고. 그런데 주인은 한마디 반론도 하지 않고 그 하인의 말대로 시중의 가게에 있는 나막신을 모조리 사들였다. 그런데 얼마 후 20년 만의 장마가 들이닥쳤다. 옛날에는 짚신을 신고 다녔기에 큰 비가 오면 낭패가 된다. 모두 나막신을 사려고 몰려들었지만 이미 시중의 나막신은 이 부자가 일찌감치 거둬들인 후였다. 그때서야 다른 하인들은 알아차렸다. 저 한심한 하인이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들로 산으로 거닐며 구름의 양과 바람의 방향을 쟀던 것이다. 개미들이 열심히 이동하는 것을 유심히 살폈던 것이다. 앞을 내다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행히 일찍 엿들었다. 10년 후의 내 모습이 궁금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찾은 답이 10년 전의 선배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질문을 했다. ‘선배님이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요.’ 나만의 미래 기획실을 만들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실수는 다 같이 하는데 프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회뿐인 삶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선배와 전문가의 입을 통해서 나온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다가올 물결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남들이 자고 있는 새벽에 말이다.


마지막으로 노니는 길이다. 누가 말했지 않은가. 인생은 잠깐 놀러 온 것이라고. 순수한 어린이로 돌아가는 시기. 이제는 인간을 호모사이언스가 아니라 호모 루덴스의 시대라고 명명하지 않았는가. 이성적 인간보다 유희적 인간의 모습으로 가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케이팝이나 영화 등이 이를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세계 곳곳의 비경을 캠핑으로 다니는 것도, 대금이나 판소리, 서예, 유화, 시 창작, 스포츠 댄스 등 12가지 취미에 빠지는 것도 후회 없이 놀다 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노니는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나고 돈이 생기면 논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돈과 시간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면 병과 약이 같이 많아진다는 것을 모른다. 나아가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 했다. 그래서 내 별명이 걸침이다.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바로 등록하고 실행에 옮기다 보니 안 걸치는 데가 없다는 뜻으로 생긴 아호이다. 죽을 때는 해본 것보다 안 해본 것에 대한 후회가 많다지 않은가. 그저 열심히 살기만 하면서 passing 하는 삶보다는 내 시간을 주도적으로 살고 즐기는 living의 삶이 멋지지 않은가.


그동안 가장의 무게를 달고 새벽을 달려오느라 바빴다. 상대의 바램을 읽고, 내일의 바람을 보는 안목. 그러면서도 마음은 어린이처럼 즐기며 지낼 줄 아는. 자, 이제부턴 더 철 없이 가슴 벅차게 노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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