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단편 희곡 '그랬기 때문에'

by 걸침

무대장치는 별로 없다.

오른쪽 상수 희미한 조명하에 현재의 나2가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


왼쪽 하수에 과거의 나1이 등장한다. 아침 10시경. 이제 상가의 가게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신사복을 입고 007 가방을 하나 들고 있다. 영락없는 세일즈맨 복장이다.


나1: (독백) 이 청계천 공구상가 같은 데서 어떻게 영어로 된 백과사전을 판단 말이야. 어휴. 우리 지배인도 참. 에이 어쩔 수 없지. 대학원 등록금은 내가 마련한다고 결심했으니.. 칼을 뺐으면 호박이라도 베어야지. 자. 이쪽 줄부터 시작하자.


신사복 안주머니에 수북한 명함을 꺼내 첫 상점에 들어선다.


나1: 저. 백과사전인데요.

상점주인: 뭐요? 됐어요. 아직 문도 제대로 안 열었는데.

나: 아. 죄송합니다.


그다음 집에 들어선다.


나1: 저 OOO에서 나왔는데요.

상점주인: 이 양반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안경을 쓰고 와서... 에이.


이후 방문인사와 퇴짜맞는 상황이 수없이 벌어진다. 어깨가 축 처지는 사내. 가방이 벌써 땅에 끌리듯 내려앉았다.


나1: (독백) 한집만 더 들렀다가 쉬자.

나1: 저 영어로 된 백과사전인데 아이들한테도 유용한 겁니다.

상점주인:(돌아보고 땀이 송골송골한 이마를 보더니) 젊은 양반이 아침부터 고생이 많소. 물이나 한잔 들고 가쇼. 사줄 형편은 못되고.

나1: ......! 고맙습.....(열다섯 번째 집 만에 듣는 인간적인 말 한마디에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물을 받아 마신다.)


장면 바뀌어 어느날 밤. 비 오는 시내.

바지가 물에 다 젖어있고 우산을 들었지만 거의 생쥐 꼴의 모습. 그래도 가방을 쥔 손은 굳건하다.


나1: (독백) 벌써 두 시간째. 영등포에서부터 걸어 온것이. 아침 버스는 차비가 없어 기사님한테 빌어서 타고 갔지만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뻔뻔하지는 못해 걸어오는 중이다. 영등포에서 청량리까지. 이 세일즈는 월급제가 아니라 수당제라, 지난주 오더를 못하면 수당이 없다. 굶어야 한다. 물론 형님과 누나에게 손을 벌릴 수도 있지만 그쪽 형편을 뻔히 아는 데 염치없이 또 부탁하기는 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그래. 걷자. 그런데 비는 왜 이렇게 쉬지 않고 뿌리지. 배는 고프고. 그래도 집까지는 아직 30분 남았으니 가는 도중에 딱 두 군데만 더 들르자. 귀찮고 두렵지만, 그런다고 내일 아침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 저기 마침 약국이 불이 켜져있네.


나1: 안녕하세요. 저녁 늦게까지 힘드시겠어요.

약사: 어이구 그렇죠 뭐. 그런데 비 많이 맞으셨네요.

나1: 아. 네. 그냥.

약사: 그런데 무슨?

나1: 아. 예. 사실은 백과사전 세일즈맨인데... 오늘은 그냥.

약사: 아, OOO요? 벌써 많이들 왔다 갔지요.

나1: 그렇지요? (씁쓸한 표정이지만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사이)


약사: 그래 많이 하셨어요?

나1: 아뇨. 제가 게을러서요. (인간적으로 물어봐 주는 상대에게 순간 울컥한다. 세일즈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 지나가다가 약사님 얼굴이 보여서 들어왔습니다.

약사: (사내의 얼굴 표정을 힐끗 쳐다보더니) 안되는 날도 있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나1: 예?

약사: 저도 이거 하기 전에 제약회사에서 영업을 잠깐 뛰어봤거든요. 쉽지 않았어요. 이해해요.

나1: ..... (나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머리를 들지 못한다)

약사:..... (사내를 다시 한번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1: .....?


(사이)


약사: 저기, 거기 어린이 백과사전도 있지요?

나1: 예? 예........

약사: 책 내용은 다른 세일즈맨한테 많이 들었으니까 필요없고요. 그거 하나 내놔봐요. 지구본하고요.

나1: 예? 지구본은 어떻게?

약사: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어린이 것 사면 지구본을 같이 준다는 거. 우리 애한테 선물로 주려구요. 곧 생일이거든요.

나1: 아. 예. 그러시군요.

약사: 계약서 내 놔봐요. 쫌 있으면 문도 닫아야하고.

나1; 아. 네 네.


예상치 못한 계약을 한 건 따낸 사내. 약국 문에서 서너 발자국 지나자 뒤를 잠깐 돌아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아싸! 하고 주먹을 치는 시늉을 하며 좋아한다. 사내, 오른 쪽 상수에 앉아있는 현재의 나를 지나가려 한다.


나2: .... (나1을 쳐다 보다가 다가간다)

나1: 누구?

나2: (나1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고생 많소.

나1: 예?

나2: 그 고생이 나중에 귀한 자산이 될 거요.

나1: 무슨?

나2: 지금의 그 끈기와 도전, 맷집이 큰 도움이 될 거요.

나1: 아니. 그걸 어떻게?

나2: 난 그저 약간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요. 당신의 그 바닥에서도 일어설 줄 아는 오뚝이 정신이 당신이 원하는 회사를 찾아 당당히 뚫고 들어가게 해 줄 것입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 앞에서 펼쳐지는 수백억 경쟁 피티에서도 당당하게 발표하여 계약을 따 낼 것입니다. 아마 그런 맷집으로 인생의 반려자도 만나 3막 5장의 긴 연애를 견뎌 결국 그녀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당신이 없었으면 후일의 당신은 없을 것입니다.


나1: 그럼, 앞으로 내 인생은 괜찮을 것 같다는 말씀이오?

나2: 난, 깊은 산속에서 수양하며 득도했다는 선사를 그리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요. 진정 득도를 하는 사람은 전쟁 같은 시장 속에서 치고 받히면서 깨닫는 범인이 진정 도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나1:.......

나2: (나1을 살며시 안아준다) 조금만 참으시오.

나1: 아? 예.....

나2: 잘 가시오.

나1: 예.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나1 오른쪽 상수로 빠진다. 나가는 사내를 한참 쳐다보는 나2. 자랑스러움과 애처로움이 교차하는 표정.

조명 페이드아웃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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