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가 멀리 가려면

by 걸침

“선배님, 커피 한 잔 사주시겠어요?”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고 선배는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젊을 때 세상 경험을 하며 학비를 벌겠다고 뛰어든 세일즈맨 시절이었다.


같이 입사한 어른들은 소위 말하는 연고판매, 즉 가족과 지인에게 억지로 떠맡겨 팔아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젊은 나는 아는 사람도 없고 알아봐야 영어로 된 비싼 백과사전을 사 줄 형편이 되는 지인도 없었다. 어쩌다가 한두 건을 한 뒤로 한 동안 실적이 없던 터였다. 이 때는 고정급이 따로 없고 오직 성과급뿐이라 실적이 없으면 수입도 없었다. 지배인의 질타도 있었고 내 학비를 위한 계획도 차질이 생길 지경이었다. 나는 생각 끝에 대학 동창명부를 구해 오래전 선배들을 차례로 찾아다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선배라고 만만치가 않았다. 세일즈맨을 하는 후배라는 것 알아차리면 전화를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하루는 세일즈 의도를 비치지 않고 접근해 보리라고 마음먹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어린 후배가 전화를 하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단 커피숍에 나온 선배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속으로는 이 난국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지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미리 밝히면 만나 주지도 않을 것을. 에라, 이리된 것 상황에 맡기자. 나는 한참이나 학교생활 얘기를 꺼냈고 선배는 너무도 즐겁게 들어주었다. 한참 흘렀을까. 생각을 했다. 이대로 인사만 하는 것으로 끝내나? 그러기엔 실제적인 결실이 없었다. 좋은 선배를 한 명 알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그리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다 말하고 세면대 앞에서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 돌아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선배의 눈치를 살피면서 5분쯤 제품 설명을 하고 있었을까.


선배가 조용히 내 손을 잡는다. 됐다고.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무엇이 됐다는 뜻인지. 선배는 팔짱을 끼더니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미리 얘기를 하라고. 후배에 대한 진심 어린 마음을 물건과 바꾸지 말라고. 이런 경우는 자기가 마지막 선배였으면 한다고. 그러고는 조용히 일어나 찻값을 계산하고 나간다. 내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던 시간이 얼마나 되었던가. 무언가 나무망치로 심하게 얻어맞은 충격이었다. 물론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 형편이 안된다던가, 이미 구입을 했다던가 구실을 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본심을 보기 좋게 들켰고 그러한 시커먼 속마음에 회초리 한 대를 세게 갈기고 간 것이다. 커피숍을 나서는 내 발걸음이 어떠했겠는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속도였다.

선배의 죽비는 내게 큰 전환점을 주었다.

나는 그 뒤로 절대로 선배고 지인이고 연고를 찾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완전히 개척판매로 나선 것이다. 몇 달을 오더 없이 굶어도 버텨 내리리라 다짐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새로운 판매처를 찾아, 방앗간 쥐 드나들 듯이 파고들었다. 물론 첫 한두 달은 손가락을 빨아 견디듯이 처절했다. 그러나 세 달이 지나고 네 달째로 들어서면서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자신감도 몇 배로 커졌고 실적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배인의 눈빛도 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주일의 판매왕 타이틀도 땄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난 예전의 그 선배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판매건이 아니니 그냥 만나 뵈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선배가 멋쩍은 얼굴로 나타났다. 그때의 후배에 대한 질책이 마음에 걸려서였는지 조금 어색한 자세였다. 선배는 대학 때 학보사 동아리를 했었다. 나는 학보사에 들러 얻은 이번 달 학보와 함께 자그마한 선물을 드렸다. 그러면서 “선배님, 고맙습니다." 크게 절을 하다시피 인사를 했다. 어리둥절한 선배는 나의 내막을 듣더니 크게 빙긋이 웃으신다. 본인도 마음이 한 켠으로 안 좋았었는데 이리 찾아와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니 너무 기쁘다고 손을 잡아 주었다.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수많은 압력을 견뎌야 된다.' 어느 책의 구절에 있는 말이라고 했다. 선배를 만나고 나오는 발걸음이 그 전의 발걸음과 겹쳐 보였다. 하늘이 맑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구가 있었다. '종소리가 멀리 가려면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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