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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티브스피커 Feb 14. 2022

오랜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서 '에픽하이' 콘서트에 갔다

나이가 들면 모든 사건을 종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은 시간 속에서 해석되고 내가 보고 있는 사건이 이것으로 끝이 아닌 것을 알기에 단일 사건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빛나는 성공을 거두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의 과거의 피땀눈물이 겹쳐서 보이고 미래에 오래도록 좋은 뒷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는 과거 빛나던 시절이 함께 떠오르고 언젠가 어려움을 이겨 내고 다시 빛날 날을 응원하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오늘이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고 데뷔 때부터 봐 왔던 가수나 배우는 오래 사귀면서 희로애락을 공유해 온 친구 같은 느낌마저 든다.


공연 예매 사이트에서 아이와 볼 연말 공연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에픽하이의 연말 콘서트 소식을 알게 됐다. 정말 반가웠다. 왜 진작 오랜 친구의 안부를 묻지 못했었는지 반성이 되고 그동안 격조했다는 깨달음이 일었다. 에픽하이를 꼭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표 한 장을 예매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에픽하이의 콘서트에 간 적이 없다. 가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음악을 즐겨 들었던 것을 생각할 때 이상한 일이다. 아니 전에도 가지 않았던 가수의 콘서트에 갑자기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이상한 일인가? 더구나 그 이유가 안부를 확인하고 싶어서라니...


공연을 기다리면서 며칠 동안 차 안에서 내내 에픽하이의 노래를 들었다. 에픽하이의 노래를 자주 듣던 시절에 내가 머물던 장소, 기분, 분위기, 그때 했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가사가 기억나는 부분은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캄캄한 연말 저녁 지하철을 타고 올림픽 공원 올림픽홀을 찾아갔다. 캄캄한 데다가 흰 눈이 쌓여 있어서 넓은 올림픽공원을 한참 헤맨 끝에 공연장에 당도했다. 내 자리는 무대에서 바라볼 때 왼쪽 2층에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의외로 내 또래도 꽤 있었다. 내내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온몸으로 바운스를 탔다. 소리를 지를 수 없으니 관객들은 몇 가지 몸짓 약속을 해야 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는 팔을 앞으로 뻗거나 발을 굴렀다. '고요 속의 외침'이 이런 걸까?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코로나 이후에 갔던 공연들 중에서 관객석이 가장 조용했던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위한 약속을 잘 지킨 공연은 보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시끄럽고 열정적인 리액션이 있었을 힙합 공연에서 고요에 가까울 만큼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리액션에 대한 열망만큼은 어느 공연보다 격렬했다.


내 오랜 친구는 잘 지내고 있었다. 나도 잘 지내고 있다고 공연 내내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매일 연락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안녕을 진심으로 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밤하늘은 까맣고 눈 쌓인 땅은 하얗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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