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블린파티X차진엽X국립무용단, <더블 빌>
어쩌다 춤 공연을 연이어 보게 됐다. 하나는 국립무용단의 <*더블 빌>이고 또 하나는 유니버설 발레단의 <돈키호테다. <더블 빌>을 일찌감치 예매해 놓았는데, 지역 예술회관에서 유니버설 발레단의 <돈키호테> *챔버 공연을 저렴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욕심을 내게 되었다.
*더블 빌(double bill) : (영화·텔레비전 프로 등의) 2편 동시[연속] 상영[방송] (옥스퍼드 영영사전)
*챔버(Chamber) : 줄거리는 이어지되 줄거리와 무관한 춤은 줄이고 재미있는 해설을 곁들여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공연 브로셔 중)
나는 가끔 공연 예매사이트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볼 만한 공연이 있는지 살펴본다. 나는 전통과 현대의 크로스오버 공연을 좋아한다. 전통의 재료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결과물이 흥미롭다. 그래서 전통 춤의 장인들이 요즘 가장 핫하다는 안무가들을 만나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서 공연을 예매했다.
고블린 파티가 안무한 '신선'
불이 켜져 있어서 공연이 시작하는 줄 몰랐다. 무대에 스탠딩 마이크가 세 대 서 있고 무용수들이 그 사이를 춤을 추며 지나다니다가 마이크 앞에서 말을 하다가 또 춤을 춘다. “이것은 맺고 어르고 푸는 이야기입니다. 오로지 춤을 추는 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잔잔한 내면이 파도를 만들어 뻗어나가는 움직임을 점차 만들어가려 합니다. 술을 한 잔 합니다. 우리는 점점 취해갑니다.” 마이크가 치워지고 무대에는 아무 장치도 없다. 신선인 무용수들이 무대에서 아주 단순한 음악을 배경으로 어떤 동작들을 한다. 무대에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움직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용수들의 동작에만 집중하게 된다. 동작들은 매우 역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시종일관 불규칙하다. 그래서 결국 스토리와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관습적인 시도를 포기하고 움직임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내가 읽은 메시지였다. 오로지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것. 나중에 읽은 안무가의 의도가 있었지만 무대 초반 공연 설명에서도 '오로지 춤을 추는 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봐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는가? 무용수들의 역동적이고 변칙적인 움직임 속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정말 좋았다.
차진엽이 안무한 '몽유도원도'
무대 위에 무용수들과 움직임만 있었던 '신선'과 달리 '몽유도원도'에서는 무용수 하나하나의 동작이 아닌 무대 전체를 봐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마치 그림자놀이를 하듯 한지 너머로 무용수들이 굽이굽이 구불구불 움직이면서 야트막한 산맥 같은 형상을 만들고 무대 벽에서는 까만 먹이 천천히 퍼진다. 전체로 하나의 수묵화를 닮았다. 그 사이로 한 명의 나그네가 괴나리봇짐을 메고 걸어간다. 그러다가 무대가 바뀌어 꿈속에 나올 법한 모습들이 보인다. 각각의 무용수는 서로 전혀 상관없는 다른 차원에 있는 듯이 각자의 춤을 춘다. 우리의 꿈이 흔히 그러하듯이 설명이 불가하다. 조명이 바뀌면서 끊임없이 무용수들의 의상의 색깔과 분위기가 바뀐다. 그 안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묘한 꿈속의 분위기와 신기하게도 찰떡으로 어우러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꿈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몽유도원도'라는 주제와 미디아트로 꾸며진 무대 장치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하나로 어우러져 마치 직접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메시지가 확실하게 전해졌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공연의 공통점이며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작은 움직임 단위로는 전통 춤사위가 맞는데 그게 모여 춤을 전체로 보면 전통 춤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라는 점이다. 정말 신기했다. 한국 전통 춤사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안무가와 그 춤사위 하나하나가 십수 년 몸에 새겨진 최고의 무용수들이 만났을 때 만들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더블 빌이 좋고 돈키호테가 불편한 이유 또는 내가 전통과 현대의 크로스오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나는 발레를 보기 위해서 판소리를 듣기 위해서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 진부한 이야기를 듣고 봐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 판소리와 발레라는 재료는 몇 백 년 전에 만들어진 한정된 스토리에 가두기에는 너무나 멋진 예술의 재료들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을 때의 신선함이 감동을 준다. 작년에 방송된 '풍류대장'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 음악이 금은보화 부럽지 않은 수많은 예술 재료를 가지고 있는 보물창고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을 길어내 무궁무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번 '더블 빌'을 통해서 춤에서도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돼서 너무 좋았다. 앞으로 내 공연 관람의 지평이 더 넓어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