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운전 중 '이희문'을 자주 듣는다. 음원 사이트에서 '이희문'을 검색한 후 전체 곡을 연속해서 듣는다. 나는 경기민요 가수들의 그 카랑카랑한 발성이 좋다. 그런데 '이희문'은 그 발성을 유지하면서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재즈니 팝이니 하는 음악들에 가볍게 목소리를 얹어 놓는다. 굳이 헤엄쳐서 어디로 가려고 하지 않고 물의 흐름 위에 몸을 맡기고 가볍게 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퍼포먼스는 화려하고 기발하며 그래서 너무나 매혹적이다. 내가 뒤늦게 '이희문'이라는 아티스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불후의 명곡 싸이 편>에서 '나팔바지'를 부르는 공연 모습을 보고서였다. 서로 이질적인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섞여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나는 단번에 매혹됐다. 그 후로 여러 공연 영상을 찾아 보고 음악을 찾아 들었다. 예매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이희문'의 공연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그동안 흠모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얼마 전 공연을 통해 이희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공연의 형식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분명 부르는 말이 있을 텐데 과문한 탓에 장르와 이름을 모르겠다. 자신의 출생과 삶의 질곡 굽이 굽이를 이야기와 노래로 풀면서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것이 흡사 <헤드윅> 같기도 하고 그게 진짜 자기 이야기라는 데에서는 <틱틱 붐>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창작 여정을 소재로 뮤지컬 워크숍을 했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것저것 비슷한 것이 있지만 역시 밴드 <까데호>를 고수로, 자기 인생을 소재로 한, 이희문의 판소리 한 마당을 봤다는 게 맞겠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많이 봤지만 S시어터는 처음이었다. 세종문화회관 건물 밖 바닥에 극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땅 밑 깊숙이 들어가니 작고 아담한 공연장이 나온다. 내 자리는 무대를 내려다보는 3층쯤 되는 곳이었다.
무대에 불이 켜지자 작은 무대 가운데 이희문이 각 잡힌 양복을 입고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그 뒤로 세 명의 밴드 멤버가 그를 둘러싸고 각각의 악기 뒤에 앉아 있다. 예매 사이트의 공연 정보를 통해서는 공연 내용, 형식, 레퍼토리 등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공연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이 안 됐다. 그러나 동영상으로 많이 봐 왔던 화려한 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 것 같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각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 멤버들의 인터뷰 음성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은 이희문이 민요가수인 엄마가 일본으로 돈 벌러 갔다가 재일교포 아버지를 만나 자신을 낳게 된 이야기를 해 나간다. 이야기 중간중간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데 그 가사가 너무나 해학적이다. 요즘 말로 웃프다. 엄마가 엔벌러 갔다는 '엔벌이 타령', 아빠가 두 집 살림을 하고 또 모자를 두고 일찍 돌아가셨다는 '무책임해', 아빠를 원망하지만 나이 들며 아빠를 닮아 가는 자신에 대한 '닮았어 닮았어' 등. 처음에는 한 사람의 내밀한 사정을 이렇게 들어도 되나 하는 마음에 공연에 집중하지 못했는데 너무나 편안하게 자기 얘기를 하고 거기에 신나는 노래와 훌륭한 연주가 곁들여지니 나도 어느샌가 편안하게 공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희문이 공연 중간에 갑자기 어머니가 지금 이 공연장에 와 계신다는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 조명이 비쳤고 고주랑 명창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주랑 명창 옆에는 이희문이 스승이라 생각하는 안은미 안무가가 앉아 있었다. 예술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 모든 요소가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의 인생을 공연으로 만든 아들의 무대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이 공연은 39금쯤 되는 공연이다. 어른들의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에 의한 공연이다. 인생에서 시간의 강을 어느 만큼 흘러 오는 동안 사랑과 원망과 화해와 연민을 모두 만나고 흘려보낸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편안함과 관대함이 느껴지는 공연. 아버지를 불러내 자신의 몸에 빙의해서 미안한 마음을 충분히 토해내게 한 후 맺힘 없이 보내 드리기도 하고, 젊었던 어머니의 고생과 고통을 같이 아파하기도 하는 공연자를 보면서 공감하고 울고 웃을 수 있는 공연. 어느 나이에 이르러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젊었던 아빠와 엄마를 내가 그보다 나이가 많아져서 토닥토닥 안아주고 위로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서야 갖게 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품이 있다. 그리고 인간사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리 놀랍지 않고 개인 개인의 속사정을 이해할 만큼의 경험치도 쌓였다. 공연을 보는 내내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관객들의 탄식과 공감의 반응들은 코로나 시대의 공연 에티켓에는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 나오는 큰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야 온전히 그 공연을 감상한 것이다. 다양한 세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연도 필요하지만 특정 세대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공연도 필요하다. 오랜만에 같은 것을 추억하는 사람들 속에서 울고 웃을 수 있는 공연이었다.
KBS 불후의 명곡 '싸이'편
SsingSsing: NPR Music Tiny Desk Conc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