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라면 살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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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들의 라면 사랑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어느 동네를 가든 라면집은 꼭 있다. 딱히 맛집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대부분 동네에 둥지를 튼 오래된 라면집은 다 맛있다. 굳이 맛집을 찾고 싶다면,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길게 줄을 선 집을 가면 분명 백 프로 맛있다. 그리고 가격도 착하고 양도 엄청 감동적일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에도 대학가답게 유명한 라면집이 몇 군데 있다. 처음에 같은 반 일본 친구들이랑 우르르 몰려가 먹은 라면집은 돈코츠 라면 전문점인데 나는 솔직히 이 돼지뼈 국물 냄새에 비위가 약하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확 퍼져 나오는 그 누릿한 국물 냄새에 나도 모르고 눈살을 찌푸리고 ' 아 오늘 점심은 이렇게 날아가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제대로 못 먹을 거 일본 애들처럼 한번 시켜보자는 생각에 라면을 무지 사랑해서 라면집 알바로 고교시절을 보낸 야마다군의 선택을 따라 하기로 했다. 먼저 라면의 삶는 정도를 3단계 중 결정하고 국물의 농도와 소위 '아브라'라고 불리는 지방의 유무를 결정한다. 라면보이 야마다 군은 꼬들한 면에 진한 국물에 아브라 듬뿍을 택했다. 그를 따라 주문서에 체크를 하는 나를 보며 나의 단짝 유끼에는 '언니... 무리일 텐데...'라고 말하며 고개를 흔든다. 그래도 무슨 객기였는지 야마다 군을 따라먹어 보겠다고 선언한 이상 나에게 번복은 없다. 어느덧 나온 뽀얀 때깔의 라면... 그리고 코를 자극하는 누릿한 돼지뼈 국물 냄새. 난 첫술에 이미 질리고 말았다. 겨우겨우 면만 건져 빨란 초생각을 듬뿍 올려 몇 젓가락 먹고 포기하고 말았다. 옆자리의 아먀다군은 '오이시'를 연발하며 맛나게 한 그릇을 뚝딱 금세 비운다. 그 후로 난 라면보다는 소바를 선호했고 어쩌다 라면 생각이 나면 미소라면을 먹었다. 숙주가 듬뿍 든 구수한 미소 라면 위에 매운 고춧가루를 솔솔 뿌려 먹으면 너무 맛있다. 마지막으로 밥을 반공기 정도 말아서 짭짤한 미소 국물과 함께 먹으면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계속 들어간다.


힘들었던 그림책 과제를 끝내고 신주쿠의 킹코스에서 프린터까지 깔끔하게 마친 후,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온 그녀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무언가 미치도록 매운 것이 당기는 순간이다. 그때 일본은 '엄청 매운데 중독 있는' 음식들이 인기였고 우리는 신주쿠에 있는 매운 라면집을 가기로 했다. 이 라면집은 매운 라면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보통, 조금 매움, 아주 매움' 3단계 중에 고르면 된다. 나는 '아주 매움'을 골랐다. '일본 음식이 매워 봤자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 언니, 이거 생각보다 매울 텐데.. 괜찮을까?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묻는다. 옆자리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일본 남자 두 명은 연신 땀을 닦아내며 '매워 매워'를 연발한다. 그래도 젓가락을 놓지 않는 그 패기가 살짝 귀엽다. '물론 괜찮을 거야'라고 답하고 주문서를 걷내고 몇 분 후 라면이 나왔다. 특이하게 두부가 듬뿍 들어가 있고 그 위에 시뻘건 소스가 흔건하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입 떠 넣는 순간, 입안 가득 매운맛이 확 쏜다. 엄청난 매운맛이다. 이건 뭐랄까 한국에서 만나 본 적 없는 종류의 매운맛이다. 두부에 면을 돌돌 말아먹는다. 매운데 맛있다. 약간 매운 김치찌개를 먹는 것 같기도 하고 끈적끈적한 국물과 두부가 감칠맛을 살린다. 몇 잔의 찬물을 마셔가며 3분 2 가량을 비워낸 나는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연신 냅킨으로 닦아내며 생각했다. '두 번은 못 먹겠다.'... 문제는 라면집을 나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가는 길에 생겼다. 갑자기 뱃속에서 뜨끔뜨끔 매운 기가 부글부글 끓더니 시야가 흐릿하다. 식은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결국 길거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후 한동안 라면집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토요일 내내 그림을 그리고 배가 고파 집을 나왔다. 근처 상점가를 어슬렁 거리며 먹을 만한 것들을 탐색한다. 어디선가 구수한 미소라면 냄새가 난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대를 이어하는 것 같은 낡은 라면집이 눈에 들어온다. 살짝 문을 열어 안을 살피고 구석자리에 조용히 앉아 미소라면을 주문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숙주와 면을 부지런히 입속으로 밀어 넣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주인 할아버지는 말없이 밥 한 공기를 테이블 위에 놓는다. '주문한 적이 없다'는 표정을 짓는 나에게 '서비스야'라고 무표정하게 툭 던지고 부엌으로 사라지신다.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는 내가 안돼 보였나? 서비스로 주신 밥 한 그릇을 야무지게 말아서 또 맛있게 먹는다. 그 덕에 든든하게 라면으로 배를 채운 일요일이 되었다. 동네 한바퀴 휘돌고 다시 집으로 가 그리다 만 그림을 완성해야겠다. 배부르니 좋구나. 라면 덕에 좋구나. 라면 살은 어쩔 수 없구나.



아네고 에미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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