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유

by anego emi

지진에 익숙해져야 하는 이유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이른 새벽이었다. 묘한 흔들림에 잠을 깼다. 처음엔 그저 조금 전 꿈속 저편에서 올린 듯한 덴샤의 우렁찬 소음이 아직도 머릿속에 뱅뱅 맴도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천장이 흔들린다. 아니 바닥이 그리고 집이 흔들린다. 깜짝 놀란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것은 내가 도쿄에 와서 처음으로 경험한 지진의 아찔한 추억이다. 그날 어학원에서는 오늘 지진에 대한 이야기로 한국 아이들은 시끄럽다. 학기초이니 나와 같이 처음으로 이 놀라운 흔들림을 경험한 학생들도 많았고 유경험자들은 자신이 겪은 더 놀라웠던 지진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바빴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구나. 땅이 흔들리기도 하는구나. 도쿄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하고.


그 후, 지진은 자주 새벽녘의 잠을 깨우기도 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덴샤를 멈추게도 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처음이 무섭지 몇 번 익숙해지면 그저 습관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일본 사람들에겐 지진이란 그런 것이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처럼 사계절이 바뀌는 처럼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이곳에서 어떤 이유든 살기 위해서라면 이 지진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동일본 대지진이 나던 날, 나는 겨울방학 중이었고 오랜만에 일러스트 책이나 실컷 볼 요량으로 롯폰기에 갔었다. 그곳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롯폰기 쯔타야 스토아가 있다. 스토아 안에 마련해 놓은 사랑스러운 테이블과 소파 위에 몸을 던지고 하루 종일 책이나 잡지를 뒤적인다. 그러다 출출해지면 실내를 커피 향으로 채우는 스타벅스에서 도넛과 커피를 사면 그만이다. 적당이 기분 좋은 음악과 조용히 움직이며 책을 보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나를 의식하거나 나 또한 그 누구도 의식할 필요 없는 곳, 나에겐 이곳은 최고의 힐링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테이블이 흔들렸다. 두툼한 일러스트 책들을 쌓아놓아 엄청난 무게에 눌려있는 네모난 나무 테이블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며 벽에 걸어놓은 광고물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진이 났으니 잠시 모두 스토아 밖으로 나가 달라'라고 했다. 나는 뭐 지진이야 흔한 일인데 뭘 또 밖으로 나가기까지... 작은 일에도 소심하고 철저한 일본인들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나는 이 나라의 타고난 재앙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스토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전화를 거느라 정신이 없다. 여기저기에서 다급한 한국말들이 터져 나온다. 급히 비행기 표를 바꾸려는 사람들과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에 지금의 놀라운 상황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충분히 그럴만할 것이다. 지진을 처음 겪었다면.. 게다가 나름 이렇게 큰 지진을 말이다. 다시 스토아 문이 열리고 다시 평온을 되찾나 하는 순간 또 테이블이 심하게 흔들렸다. 심지어 벽돌처럼 층층이 쌓아놓은 테이블 위의 책들이 우두둑~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 아... 이거 오늘은 좀 심한데...'라는 생각이 불쑥 드는 순간 ' 지진으로 인해 지금부터 스토아 문을 닫아야 하니 모두 나가야 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좀 심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문까지 닫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불만을 혼자 토로하며 스토아를 나왔지만 마음먹고 나온 이 외출을 이대로 접고 싶지 않았다. 근처 다른 북 스토아에 가서 책이라도 좀 더 보고 싶어 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주변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 중이었고 손님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이 분주하다.' 역시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은 집으로 일찍 가라는 신의 계시인가?'


지하철역으로 투벅투벅 발걸음을 옮기는데 근처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의 쇼윈도 앞을 사람들이 꽉 메우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은 심각하고 어떤 사람은 연신 '큰일 났다'를 연발했다. 틈을 비집고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높이 들어 보니 쇼윈도 속 티브엔 지진으로 인해 바다의 엄청난 파도가 밀려와 무너진 집이며 산이며 원자력 발전소이며

그것을 생중계하느라 정신이 없다. ' 아... 이건 엄청난 거다. 진짜 엄청난 거다.' 순간 '아... 우리 집은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지하철역으로 갔다. 그러나 지하철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여기저기 쭈그려 앉아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하철 표를 사려고 하는 순간, 또 안내 방송이 나온다. '지진으로 인해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었으니 다시 운행될 때까지 기다려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멍하니 지하철 안을 두리번거린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답답하고 조급해진 나는 역무원에게 '언제쯤 지하철이 다시 다닐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고 그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만약 '네가 빨리 가기를 원하면 다른 교통편을 위한 프리티켓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탈 수 있는 티켓을 주고 버스 장류장을 알려주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기다란 겹겹의 줄이 늘어져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집까지 꽤 먼 거리이고 걸어서 가는 것은 이 추위에 엄두도 안 나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2시간 반을 기다려 겨우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움직이지를 않는다. 도로는 차들로 넘처난다. 이 순간 움직이는 이동수단은 자동차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한 시간을 거북이걸음으로 달려 겨우 몇 정거장을 갔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버스 안의 그 누구도 불평불만이 없다.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소리는 외국인들의 전화 벨소리와 그들만 아는 그들의 모국어다. 이 난리통에서 일본인들은 그저 침착하다. 그들의 업보인 이 재앙을 조용하게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며 참아내는 것이다.


결국 버스에서 내려 나는 2시간 이상을 걸어 겨우 재개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리의 경찰들은 일사불란했고 걸어서 집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길 안내를 했다. 그리고 근처 큰 건물과 경찰서는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대중교통의 복구 현황을 빠르게 업데이트를 시켰다. 차가운 밤거리를 사람들은 말없이 걷는다. 심지어 겨울밤 깜짝 소풍을 가는 것처럼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한다.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와 빵을 먹으며 삼삼오오 걷는다. 나는 이 풍경에 처음에는 놀랍고 점점 대단하다는 생각을 그리고 마지막엔 알 수 없는 소름이 끼쳤다. 질서 정연함을 넘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 엄청난 북새통을 군소리 없이 무마시키는 그들이...


돌아온 내 집은 마치 좀도둑이 무언가 훔쳐갈 것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미친 듯이 뒤지고 다닌 것처럼 난리가 나있었다. 책꽂이의 책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벽에 걸어놓은 옷들도 여기저리 흩어져있었다. 바닥에 놓인 컵과 화장품들도 모두 쓰러져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만약 혼자 이 집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무서웠을 것 같다. 차라리 밖에 있었던 것이 나에겐 행운이었다. 게다가 롯폰기는 핫스폿이니 나름의 철저한 대비와 조치가 빨라 사태의 심각성을 쉽게 눈치 채지 못했으니까. 방을 정리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그간 불통이 되었는지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다.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란 엄마다. 나는 안전하고 일본은 잘 대처 중이고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킨다. 엄마의 전화를 끊자 지인들의 걱정의 문자가 줄 줄이다. 제삼자의 시각에선 티브 속에 펼쳐진 이 난리가 엄청난 재난으로 비쳤을 것이다. 다음 날이 밝았다. 아침에 커피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런데 동네는 너무나 평화롭다. 늘 그랬듯이 아이들은 햇살 아래 뛰어놀고 노인들은 화분에 물을 주고 상점가의 상인들은 가게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한다. 이들의 이 평온함 속에선 어제의 난리에 대한 흔적이 하나도 없다. 나 또한 커피 한잔을 테이크 아웃하고 샌드위치를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학교 동생에게 전화가 온다. 지금 신주쿠에선 슈퍼에 생수와 라면 티슈 등이 동나고 있다고. 지진으로 인해 지방에서 공급되는 물자들이 중단되어 곧 동이 날것이니 언니도 얼른 몇 개 사놓으라고. 알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저녁 무렵 생수를 사러 간 슈퍼엔 언제나처럼 저녁장을 보는 사람들로 넘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소위 사재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늘 그렇듯이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나 또한 생수 한통과 컵라면 하나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 일없었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엄청난 지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으니까.


아네고 에미

<매일 화요일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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