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알기 시작한 그림 그리는 즐거움

by anego emi



길고 답답하고 추웠던 겨울방학이 끝났다. 늘 다니던 그 길에 이름 모를 봄꽃들이 피기 시작하고 알록달록 곱게 차려입은 일본 할머니들이 강아지와 함께 봄햇살 속을 산책한다. 개학을 이틀 앞두고 떨어진 물감들과 바닥난 종이를 사기 위해 집을 나왔다. 역전에 자리 잡은 노포의 빵집 앞에 활짝 핀 봄꽃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나 또한 급히 전철을 타기 위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다 보라색의 앙증맞은 꽃봉오리와 눈이 마두 치고 만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의 햇살을 타고 고개를 내민 이 아름다운 생명체 앞에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잠시 쪼그려 앉아 이 녀석을 흐뭇한 미소와 함께 묵묵히 본다. 그 순간, 빵집 할머니가 내 옆에 앉으며 말을 한다. " 이 꽃은 딱 요맘때만 피는 꽃이에요. 작고 약해서 잘 피지 않는데 이번엔 용쾌 피었네. 올봄에는 아가씨가 운이 좋겠어. 좀처럼 볼 수 없는 이 꽃을 보는 행운을 잡았으니까. " 그리고 꽃이 피는 것처럼 활짝 웃으신다. 할머니와 꽃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다시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봄햇살이 쏟아지는 전철의 출입문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아본다. 그 순간 문뜩 바쁘고 숨가프게 보냈던 지난날의 수많은 나의 봄들이 떠올랐다. 꽃이 피는지도 지는 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낮의 봄햇살이 얼마나 따뜻한 지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나의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지금이라도 알게 된 이 봄의 축복 앞에 마냥 행복하다. 대단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그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눈과 마음을 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으니까.


2학년의 되자 선생님들은 남은 1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다양한 커리큘럼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취업과 진학에 포커스를 둔 포트폴리오 제작과 졸업작품의 준비다. 학교는 재학생들의 다양한 전시를 준비하고 이 학교를 거쳐 프로로 자리를 잡은 선배들을 초대해 그들과의 자연스러운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준다. 이것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제삼자이자 전문가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새학기와 함께 우리가 준비한 첫 전시는 아트북이다. 자신의 작품을 테마별로 엮어서 책을 만들어 전시한다. 작품의 주제도 사이즈도 각자가 자유롭게 결정을 하고 각 수업시간마다 짬을 내어 선생님들에게 작품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 조금 특별한 수업을 듣고 싶었던 나는 이번에는 큰 맘먹고 전공이 아닌 아트과의 표현 수업을 선택했다. 이 수업을 담당한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유쾌한 말발로 우리들을 한없이 웃게 하고 가끔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실망스러운 우리의 작품 앞에서 다시 설 수 있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준다. 선생님은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을 이 수업의 과제로 삼았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물감이든 색연필이든 목각이든 무엇이든지 정해서 그것으로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어 자신의 방식으로 전시해 보라고 했다. 나는 몰랑몰랑한 찰흙으로 수십 송이의 벚꽃을 빚어 모빌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모빌과 함께 봄을 기다리는 설렘을 담은 아트북을 전시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찰흙 빚는 법부터 한송이 한송이 완성한 꽃송이들을 엮어 작은 구슬들과 함께 매다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덕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드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드디어 전시회 날 나는 내 작품을 정성을 다해 전시를 하고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환하게 웃는다. 뭐 랄까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세상에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그러니까 더 잘 그리는 것보다 나답게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올봄의 끝자락에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이 전시에서 선후배들의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아 베스트 세븐에 뽑히고 말았다. 그리고 내 작품 앞에 놓인 작은 상자에는 응원의 메시지가 담긴 종이가 수북이 쌓였다. 하나하나 조심스레 꺼내 읽기 시작하는 나에게 누구가 어깨를 툭 하고 친다. 고개를 돌아보니 댓생을 가르치는 사토 선생님이다. 그리고 나에게 엄치를 척하고 올려주신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저 환하게 웃는다. 이런 반응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대단한 것을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만드는 즐거움에 그리는 즐거움에 취해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이 시간들에 집중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만든 그 무엇은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마음이 쌓여 완성된 완벽한 작품보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탄생한 조금은 부족한 작품이 사람들에게는 더 위로가 돨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내 작품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같이 부스를 나눠 쓰던 친구들과 우르르 모여 장난을 치며 단체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일주일간 나의 분신이 되어 나를 보여주었던 작품을 품에 곱게 안고 나는 붉은 노을이 지는 오차노미즈 역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감사한다. 서서히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모두에게 그리고 그 모든 소중한 나의 순간들에게...


아네고 에미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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