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끝났다. 도쿄의 여름은 변함없이 찜통이었고 잠 못 이루는 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무거운 머리와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온 학교는 아침부터 떠들썩하다.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모인 아이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고 선생님들도 다시 시작되는 한 학기를 위한 워밍업이라 생각했는지 모른 척 그냥 넘겨주신다. 가을 학기는 10월에 열리는 학원제의 작품 발표로 시작되었다. 선생님들이 정해준 테마에 맞춰 작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짧은 기획안을 쓰고 그것을 가지고 각자가 정한 담당 선생님들과 미팅을 한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모여 작품을 발전시키고 완성시켜 나간다. 올해의 주제는 '자연과 생명의 탄생'이었다. 맨날 자신이 좋아하는 것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던 우리들에겐 꽤 무겁고 어렵고 막막한 숙제다. 일단 주제에 대한 해석도 어렵다. 모든 일러스트과 학생들이 모인 대 회의실에서 학과장 선생님의 학원제 작품 주제가 발표되자 아이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 ' 뭘 그리란 거야?' '자연과 생명? 과학시간에나 듣던 소리 아냐?' 불만 썩인 아이들의 반응을 선생님은 변함없는 환한 미소로 무마시키며 ' 자..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해보고 각자 그것에 대한 자신들만의 아이디어를 찾아보자'라고 말했다. 나의 클래스 메이트 1호인 유끼는 연신 손가락으로 연필을 돌려대며 ' 이런 주제를 도대체 누가 생각해 낸 거야? 뭘 그리란 거야 말라는 거야? '라고 툴툴 됐다. 그러다 내 옆으로 슬쩍 고개를 밀며 '언니는 뭔가 느낌이 와?'라고 물었다. 나라고 다르겠는가?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보고 웃는다. 학교 오는 것이 마냥 놀러 오는 것 같이 즐겁기만 한 우리들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친 것이다.
나는 담당 지도 선생님으로 그림책 일러스트를 가르치는 50대 초반의 남자 선생님을 선택했다. 매번 과제가 많고 깐깐해서 아이들에게 별 인기가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좋았다. 무엇이든 그리고 만들어 선생님에게 펼치면 많은 조언을 아낌없이 쏟아내 주셨고 늘 뭔가에 목말랐던 나에겐 큰 공부가 되었다. 첫 기획안 미팅이 있던 날... 역시 교실은 텅 비어 있다. 나를 포함해 열명도 채 되지 않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지도교사로 선택한 것이다. 친구같이 편하고 잘 맞춰주는 여자 선생님의 옆 교실은 아이들로 넘처난다. 선생님은 학생수가 많지 않은 것이 자신은 더 좋다며 모두에게 더 신경을 써 줄 수 있고 함께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신다. 그날 기획안을 제대로 써 온 학생은 나뿐이었고 선생님은 아무것도 해 오지 않은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불러 아이들의 생각을 말하게 했다. 그리도 다음 시간에도 빈손이면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 너를 위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차라리 다른 곳에서 기획안을 쓰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볼품없는 기획안에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아울러 다음에 더 생각해 보면 좋을 점들을 지적하고 참고하면 도움이 될 작가의 작품들도 리스트업 해 주셨다. 그날 나는 마치 개인지도를 받는 느낌으로 많은 것을 질문했고 또 궁금했던 답을 얻어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신이 났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과 선생님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뭔가를 그려 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자신감이 꿈틀 되는 것 같았다.
몇 번의 스케치 작업을 거쳐 최종 컨펌을 받은 나는 처음으로 A1 사이즈의 캠버스에 아크릴로 작품을 그려 보기로 했다. 아크릴이라는 물감은 나에게 마냥 낯설고 두려운 존재이지만 선생님은 시도해 보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딱 맞는 도구라고 했다. 신주쿠에 있는 대형 화방으로 가 나는 용감하게 캠버스를 사고 아크릴 물감도 몇 개 골랐다. 그 순간 회사에 들어가 첫 프로젝트를 맞을 때처럼 심장이 뛰었다. 물감 몇 개 고르는데 한 시간이 훌쩍 갔다. 그게 뭐라고 몇 번을 고민하고 또 비교하고... 물론, 아크릴 물감 값이 만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작품에 필요한 것인데 아낌없이 질러도 될 것 같았는데 나는 세상 무엇을 고를 때 보다 집중하고 신중했다. 화방 로고가 새겨진 큰 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화방을 나와 신주쿠 거리를 걷는다. 어느덧 하늘은 깜깜해지고 거리는 화려한 불빛으로 눈이 부시다. 문뜩 처음 도쿄에 와서 멍하니 정신줄을 놓고 신주쿠의 밤거리를 방황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일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그 길을 또 걷고 있다. 그때와 다른 설렘과 막연한 기대로 그 길을 또 걷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바람이 분다. 시원하다. 아.. 가을이 오는 것 같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꽉 찬 보름달과 희미한 별들이 내 눈 안으로 쏟아진다. 그래... 이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거다. 이 가을바람처럼 나의 학원제는 시작되는 것이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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