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다가오면 늘 지나치던 덴샤 역의 벽에는 JR에서 청춘 티켓을 판매한다는 포스터가 붙기 시작한다. '청춘... 그 단어만으로 잠시라도 설레었다면 당신은 아직 청춘이다' 포스터 속 카피에 가슴이 뭉클했다. 양손에 꼭 쥔 무거운 가방을 나도 모르게 슬쩍 놓고 만다. 나에게도 청춘이라고 불리던 그 시절이 분명 있었기에... 매일 나는 이곳의 청춘들과 학교라는 곳에서 조우한다. 그들은 딱히 꿈이라던가 미래를 위해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없어 보인다. 그저 하루하루 그들답게 즐겁게 살기를 원한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나의 시각에서 보면 한심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청춘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편안해진다. 경쟁을 강요하지 않는 학교의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결과물 앞에 그저 다를 뿐이라고 말하니까. 그러나 나는 조금씩 조금씩 조급해졌다. 좀처럼 늘지 않는 크로키 실력도 그리고 싶은 것을 맘껏 자유롭게 그리지 못하는 내 답답한 스케치도... 나는 아무리 애써도 다시 청춘이 될 수 없었다. 그저 갈길이 급한 나이가 무거운 이곳의 이방인인 한국 여인일 뿐이다.
오후 시간 내내 계속된 댓생 실습은 원래부터 굳어있던 내 어깨와 팔을 더욱 단단히 마비시켰다. 욱신 되는 어깨와 팔을 번갈아 두드리며 집으로 가는 덴샤를 기다린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툭하고 건드리며 '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말을 건넨다. 뒤돌아 보니 댓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이 선생님은 일본의 그림 천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도쿄 예술대학 조소과를 나와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계시다. 언제나 날카롭게 댓생 스케치의 잘못된 점을 집어내신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약간의 수험료를 내고 듣는 특강으로 댓생을 신청한 덕에 나는 오늘 같은 날은 3시간의 댓생 수업이 끝난 후에도 2시간을 더 선생님과 함께 댓생 수업을 이어간다. 정말 연필 깎는 것, 선긋기부터 시작한 나의 왕초보 댓생 실력을 이만큼이라도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지도와 응원 덕분이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찾아내게 하고 잘 표현되지 않아 스스로 지칠 때마다 내 그림의 매력포인트를 찾아내 칭찬해주신다. 늘 자신감이 없어 희미하고 약한 선의 내 그림을 선생님은 선이 부드럽고 섬세하다고 그렇게 반복하면 언젠가 자신감이 붙는다고 응원해 주셨다. 그 덕에 나는 동그라미 네모를 떠나 박제된 오리도 그리고 심지어 투명한 병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님과 나는 비교적 한적한 덴샤 속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걸어야 하는 걸까? 어색한 시간이 흐리고 선생님은 묵묵히 앞을 보며 한마디를 건네신다. " 김... 너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좀 즐기면서 해도 되지 않을까? 실력이 천천히 늘어가면 더 단단해지니까. 그냥 신나게 하기만 하면 되잖아? " 그리고 그분만의 특허인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신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놓은 무거운 가방을 꽉 껴안는다. 그 순간 바보처럼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떨어진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만다. 이 눈물을 선생님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못 본 척 다시 앞을 보신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손을 흔들며 내리신다. 그러고 보니 일을 떠나 맘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어렵게 떠나 온 유학길에 난 또 나를 힘들게 한다. 내가 이곳에서 청춘이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이 탓도 아니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내 탓인 것이다. 나를 자유롭게 그리고 좀 더 편하게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것. 그저 옭아매고 닦달하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 그것이 진짜 이유인 것이다.
1학기 수업이 끝나는 마지막 날 나는 청춘 티켓을 샀다. 다시 청춘이 되어 보기로 했다. 나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다. 이 티켓을 손에 쥐고 나는 기차 여행을 떠날 것이다. 목적지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다. 그저 떠나보기로 했다. 어느 역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잠시 내려 동네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것이다. 더 이상 나를 구속하는 나는 없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청춘이 되어 새로운 나를 만나야 한다. 그게 바로 내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