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그리고 싶은 걸까?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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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아침은 분주해졌다. 학교까지 3번의 덴샤를 갈아타고 1시간가량을 가야 하고 물감이며 종이며 스케치북이며 망가지지 않도록 큰 천가방에 쑤셔 넣고 어떤 날은 노트북까지 한 손에 들어야 했다. 출근시간과 겹칠 수밖에 없는 나의 등교시간은 서울 못지않게 사람들로 숨이 막혔고 겨우 중심을 잡고 배에 힘을 꽉 준다. 유난히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은 어느 날... 오후 수업시간에 쓸 종이들이 최대한 구겨지지 않도록 공간을 확보하고 창밖을 본다. 그래도 깜깜한 지하가 아닌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파란 하늘도 꽃이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나무도 다닥다닥 붙은 키 작은 도쿄의 집들도 볼 수 있으니까. 마치 오늘도 아무 일없이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으니까.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 순간... 덴샤가 쿵하고 멈춘다. 사람들은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움직임이 없다. 하이톤의 안내방송이 흐른다. 앞 역에서 역으로 뛰어드는 자살 사고가 있었고 지금 수습 중이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이른 아침에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기에 분주한 지금 누군가는 달려오는 열차 앞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길래...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더욱 소름이 돋는 것은 이 엄청난 사고에도 열차 속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늘 일어나는 보통의 일인 듯 손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 거나 만화를 보거나 눈을 감고 침묵할 뿐이다. 그 후로 난 이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이 끔찍한 사건의 아픈 숫자들을 세기 시작했다. 정말 매일매일 그 누군가는 이 숫자를 꼬박꼬박 더했다. 몇 달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저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늘에서라도 편히 쉬기를... 가만히 눈을 감은 나 또한 이제 이 열차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어떤 이유든 봄의 학교는 늘 설렌다. 그리고 활기가 넘친다. A, B, C, D... 네 클래스로 나눠진 일러스트 과는 압도적으로 여학생들이 많다. 그리고 올해는 무슨 이유인지 유학생들도 별로 없다. 우리 클래스는 25명 중에 5명이 남학생이며 유학생은 나와 대만에서 온 남학생 단 둘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정말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8-19살의 일본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고등학생 티가 폴폴 나는 그들은 그저 쉬는 시간에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수업이 끝나면 핸드폰 게임을 한다. 아직 그림에 대해 아무런 기초가 없는 우리는 오전의 첫 수업시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 무엇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솔직히 몰랐다. 미술학교라는 곳... 소위 미대라는 곳은 그리는 법을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것을 도와주는 곳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그리지 않으면 선생님들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저 네가 뭘 그리고 싶은지 그것을 생각해 보라는 말의 반복과 거의 생활상담 수준의 질문들을 던진다. ' 어릴 때 좋아했던 것은 뭐였어? ' ' 뭘 할 때 가장 행복했어? '너를 웃게 하는 것은 무엇이야? ' 나에게 던져진 이 유아적인 질문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림이나 가르쳐 줄 것이지 이런 어이없는 질문은 뭐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이 단순한 질문 앞에 선뜩 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그래. 나는 뭘 좋아했고 뭘 할 때 행복했던가. 나를 그저 나답게 웃게 했던 것은 그 무엇이었나? 이 질문의 답이 한 한기 동안 이어질 이 수업의 첫 번째 과제를 풀어갈 단초이다. 이 단초가 나를 자극해 내가 그리고 싶은 그 무언가를 그리게 할 것이고 내가 그린 그 무엇에 날개를 달아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조언을 시작할 것이다. 금세 답을 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그럼 천천히 생각해보고 또 이야기 하자며 다른 학생들의 자리로 옮겨갔다. 그러보 보니 나를 버리고 나라는 존재를 잊고 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처음으로 가만히 나에게 집중해 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치하고 유약한 생각들은 부끄러운 마음에 자신감을 잃고 만다. 그러다 문뜩 내 앞에 놓인 스타벅스의 종이컵 잔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사회라는 에 발을 내딛딘후 그저 급하게 흐르기만 했던 시간 속에서 나를 언제나 위로했던 것은 이 커피였다. 커피를 그리자.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마셨던 가장 행복했던 커피를 떠올려 본다. 뉴욕으로 친구를 만나러 간 어떤 날. 친구의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마셨던 커피 한잔이 떠오른다. 그 옆에는 작은 노트가 펼쳐져 있고 나는 그 위에 끄적끄적 낙서를 한다. 그러다 커피 한 모금을 넘긴다. 그런 내가 행복해 보인다.


한참 스케치를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 모두 무언가를 그리기에 집중해 있다. 조용히 옆을 보니 내 옆에 앉은 가냘픈 소녀는 공원의 새들을 그리고 있다. 뒷자리의 덩치 큰 남학생은 큰 대접의 미소라면을 그리며 연신 웃고 있다. 앞자리의 양갈레로 머리를 곱게 묵고 동그란 안경을 쓴 그녀는 방바닥에 가득 쌓인 귤 앞에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각자 제각 기다. 역시 이들은 아직 때 묻지 않았다. 자신을 웃게 하는 그 어떤 것 앞에서부끄럽지도 기죽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빠져 마냥 행복해진 표정들이다. 그런 그들이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순간이다. 다시 연필을 꽉 쥐고 그림을 그린다. 무엇을 그리든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채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그만인 거야.



아네고 에미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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