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뜨거웠고 나는 그 더위만큼 단단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덧 아라쉬의 히트곡이 좁은 내 방안에 울려 퍼지고 1인용 작은 밥솥에서 막 한 밥을 공기에 고봉으로 담고 후리카게를 솔솔 뿌려 뚝딱 비워낸다. 덴샤 앞 맥도널드에서 너무나 착한 가격의 맛있는 커피도 테이크 아웃하고 학교로 향한다. 이제 조금씩 일본어가 익숙해지면서 도쿄 생활이 주는 나만의 작은 즐거움들을 발견하게 된다. 동네에서 우연히 찾아낸 너무 맛있는 라면 가게라든가 지는 노을을 보며 편의점 앞에서 먹는 야끼 토리라던가 잠 못 이루는 밤 골목 초입의 이자카야에서 혼자 홀짝이는 맥주 한잔과 토마토를 잘게 썰어 넣은 토마토 교자의 환상적인 맛이라던가... 일본어 능력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모두 막바지 준비에 열을 올린다. 나야 말고 이 시험에서 반드시 2급을 패스해야 한다. 그래야 원래 계획했던 대로 내년에 전문학교로의 진학이 가능하니까.. 시험은 생각보다 나에겐 어려웠고 아직도 깨끗이 회복되지 않은 나의 왼쪽 귀는 긴장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따끔거렸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그저 행운이 조금이라도 나에게 마음이란 걸 써주길 바랄 뿐이다.
시험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전문학교에서 마련한 체험 수업에 참관하기로 했다. 이 수업은 자신이 지원하고 싶은 학교에 미리 인터넷으로 신청을 하면 그 학교에서 하루 동안 학생으로서 수업을 듣고 선생님들은 물론, 재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룰 수도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 게다가 무료이고 학교에서 마련한 점심과 간단한 다과까지 제공받는다. 부지런히 여러 학교를 시간이 겹치지 않게 신청하면 학교마다 특장점을 나름 비교해볼 수 있고 또 궁금했던 것들을 마음껏 물어볼 수도 있다. 나도 몇 군데 신청을 해서 참관하기로 했다. 엄청나게 친절하고 상냥한 선생님들과 스텝들이 언제나 격한 환영을 해주었고 수업은 그저 원하는 것을 그려보라. 그리고 그리는 동안 선생님들과 스텝들이 돌아다니면서 그것에 대해 코멘트를 해준다. 물론, 모두 일방적은 칭찬일색이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수업은 시부야에 있던 전문학교였는데 나름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선생님이 그날의 교사로 섭외되었다. 선생님은 도쿄의 여름을 그려 보라고 했다. 교실을 꽉 매운 학생들은 부지런히 무언가를 그리고 나 또한 무언가를 그렸다. 시간이 지나 모두 그림을 제출하자 그 그림을 하나하나 칠판에 붙이고 나름의 코멘트를 시작했다. 내 눈에는 그림인지 낙서인지 그저 휘갈 김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림들 속에서 선생님은 장점을 찾아내셨다. 그리고 그 장점에 가능성이라는 작은 날개를 잊지 않고 달으셨다. 그 코멘트들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의욕만 앞선채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나에게 자극이 되었음은 물론, 잠시 숨죽이던 용기와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보잘것없고 창피하기만 했던 내 그림에도 선생님은 많은 코멘트를 해주셨다.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꼼꼼히 집어내고 마지막으로 일러스트레이터로써의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도 덧붙여 주셨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감사하던지. 돌아오는 길의 숨 막히는 시부야역 덴샤 속에서 나는 그저 혼자 행복했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배가 고팠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힘이 나는 저녁이었다.
내가 선택한 학교는 미술학교들이 모여있는 오차노 미즈에 있는 전문학교다. 무엇보다 학교 주변이 너무 아름다웠다. 가을이면 문화제가 열리고 주변의 아름다운 책방과 오랜 찻집과 화방들 그리고 다리에서 내려다보는 오차노 미즈 강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저 드라마 속 풍경 같았다. 매일 이 풍경을 보며 등하교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들떴다. 아울러 도쿄에서 가장 큰 디자인 전문학교인 만큼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프로그램이 많았고 배려도 남달라 보였다. 마지막 일본어 시험과 인터뷰를 앞두고 모든 서류 절차를 끝냈다. 일본어 능력시험은 정말로 간당간당 턱걸이로 합격을 했다. 합격을 한 것이 그저 나에겐 기적이다. 일본어 능력시험 2급 합격증을 복사해서 제출하고 50분 동안 학교에서 마련한 일본어 시험을 치른 후 인터뷰를 위해 유학생 담당 선생님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날카로운 여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서류를 뒤적이다 '어려운 결심을 했으니 그만큼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너의 일본어는 반드시 나에게 검증되어야 한다고 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다. '왜 일러스트를 공부하고 싶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너의 계획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나는 짧게 내 이력을 소개하고 일러스트를 배워 한국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말하는 내내 미동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앞에 놓인 녹차 한 모금을 조용히 넘긴다. ' 알겠다. 너의 계획도 너의 용기도. 이 학교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너의 일본어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너의 계획을 이루는데 일본어가 방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일본어 공부에 열중해 주겠니?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본에서도 작가로서 너의 가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길 바라며 우리 학교가 그것을 도울 수 있길 바란다. 너는 멋진 여자인 것 같다. 꼭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꼭 잡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내 어깨를 말없이 안아준다. 그리고 토닥여 준다. 선생님의 방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유학생 담당 카운슬러는 나를 학생상담실로 데리고 가서 입학절차를 위한 서류와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며 다음 주에 합격증을 줄 터이니 다시 방문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올해 우리 학교에 합격한 첫 번째 유학생이라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저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들이 배웅을 받으며 학교를 나왔다. 뉘엿뉘엿해가지는 늦가을의 오차노 미즈는 너무 아름다웠다. 하늘의 노을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녹색을 품은 묘한 자줏빛이 되어 있고 그 사이를 뚫고 덴샤가 지나간다. 오랜만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다리 한가운데서 멍하니 강물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다. 그래... 이제 진짜 도쿄에서의 유학생활이 시작되는 거다. 이제야 말로 시작되는 거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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