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버티는 힘... 오니기리 세 개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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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의 두 번째 여름이다. 처음과 달리 마음의 준비를 한 덕인지 익숙해진 덕인지 이 더위 앞에 침착해진다. 그저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조그만 내 방은 하루 종일 선풍기 팬의 소리가 멈추지 않고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은 점점 늘어난다. 열대야를 이기는 나만의 요령은 그저 너무 더워 잠 못 드는 밤은 자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잠을 설쳐 피곤하거나 안 자서 피곤한 거나 어차피 피곤한 것은 같으니까. 억지로 잠을 청할수록 정신은 맑아지고 더위는 더욱 실감 나게 나의 온 신경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짝바짝 마르게 한다. 차라리 잠을 포기하고 노트북에 담아온 드라마를 보거나 동네를 산책하거나 만화책을 읽는다. 그러다 기운이 뻗치면 일본어 공부를 시도해 보지만 결국 한 챕터를 넘기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도쿄에서의 나의 여름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어학교는 여름 방학에 들어가고 개학과 함께 닥칠 일본어 능력시험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선생님은 당부를 하신다. 아... 시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 시험이라는 단어 앞에 또 심장이 뛴다. 이 시험에서 점수를 제대로 따지 않으면 내년에 전문학교로의 진학은 어려워진다. 여름방학이지만 능력시험을 위해 나름 어학원에서 족집게로 유명한 배테랑 선생님의 보충수업을 선착순으로 수강생을 받는다. 나름 경쟁이 치열했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무거운 나이로 나는 어렵지 않게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사라진 어학원은 고요했고 선생님의 수업은 긴장 속에서 속도를 내고 나의 집중력은 그만큼 올라갔다. 수업이 끝나면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잔과 함께 오늘 배운 것을 복습했다. 그렇게 몇 주를 반복했다. 나의 하루는 아무런 변화도 새로움도 없이 이 뻔한 루틴 속에서 동글동글 천천히 흘러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침 샤워 도중 왼쪽 귀에 샴푸 거품이 들어갔고 따가움을 느낀 나는 급한 마음에 샤워기를 높이 들고 왼쪽 귀를 비스덤이 누인다. 그 순간 물은 내 귓속으로 쏟아진다. 놀란 나는 급히 물을 털어내고 몇 번이나 면봉으로 닦아냈다. 그날따라 더위는 더 기승이고 나의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왼쪽 귓속을 누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잠을 깨고 만다. 통증은 간혈적으로 반복되고 점점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온다. 온통 신경은 귓속의 통증으로 집중되고 손발이 점점 저려온다.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열고 녹차 한잔을 천천히 마셔본다. 정신은 순간 또렷해지고 크게 숨을 내쉬는 순간 귓속의 통증은 누군가 가늘고 긴 바늘로 콕 힘 있게 찌르듯 세기를 박는다. 온몸이 짜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다시 몸을 누이고 아픈 귀에 손을 얻고 토닥여 본다. '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 그러나 창밖이 어느덧 서서히 서슬 퍼런 빛깔을 띄기 시작해도 통증을 괜찮아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또르릇~ 배게 위로 떨어진다. 억지로 눈을 감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한다. 나이 들어 점점 약해지는 이 마음은 이제 스스로 제어할 힘을 어느덧 잃고 만다.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다는 것은 그저 서글픔으로 귀결되고 만다. 아침이 되자마자 인터넷 검색을 하고 동네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병원은 생각보다 붐비었고 귀의 통증을 꾹꾹 참아내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인상 좋은 어머니 같은 여의사는 나에게 귀에 염증이 생겼고 중의 염이 의심되니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근처 약국에서 한참을 또 기다려 약을 타고 어학원으로 향했다. 어학원 초입에 있는 편의점에서 오니기리 세 개를 샀다. 하나는 수업 시작 전에 먹어야 할 약을 위해서 이고 또 하나는 2교시가 끝난 후 점점 떨어지는 기력을 밥심으로라도 올리기 위해서고 마지막 하나는 수업이 끝난 후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을 헤치고 자리가 있는 한적한 근처 카페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다. 예상대로 일본 약은 먹어도 금세 효과를 내지 못한다. 통증의 강도는 좀 줄기는 했지만 집중해야 하는 수업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주가 흘렀다. 한번 더 병원을 다녀왔고 꾸준히 약을 먹어도 귀는 회복되지 않는다. 드디어 보충수업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개학과 동시에 치르게 될 시험에 참고가 될만한 문제집을 나눠주신다. 어학원을 나서며 세 번째 오니기리를 한 입 깨문다. 그리고 근처 카페로 향한다. 차가운 냉방 덕에 약간의 한기를 느낀 나는 오랜만에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문제집을 펼친다. 그래도 잘 버텨냈다. 보충수업에 들은 내용들은 나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주기에 차고 넘쳤다. 향긋한 커피 한 모금을 넘긴다. 갑자기 온몸이 노곤해진다. 졸음이 몰려온다.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그리고 나는 꿈을 꿨던 것 같다. 꿈속에서 나는 일본어 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모 대학교의 강의실에 있고 듣기 시험이 한창이다. 귀에 통증을 느낀 나는 괴로워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주변의 수험생들은 모두 신나게 답을 적어 내려간다. 나만 멍하다. 내 손에 꼭 쥔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깜짝 놀라 연필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났다. 귀의 통증은 멈추지도 진행되지도 않은 그 상태 그대로다. 식은 커피 한 모금을 급하게 넘긴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본다. 강해져야 한다. 약해져서는 안 된다. 이 또한 시간이 약이 되어 지나갈 것이고 나는 무사히 일본어 능력시험을 치를 수 있는 컨디션으로 회복될 것이다. 부지런히 약도 먹고 밥도 잘 챙겨 먹고 공부도 하고 그러면 되는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귀의 통증이 사라졌다. 물론, 저녁이 되면 열대야가 몰려오는 새벽이 되면 또 스멀스멀 나에게 다가올 것도 알고 있지만... 이 순간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기분을 느낀다. 푹푹 찌는 여름밤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한줄기의 바람이 내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남은 커피를 모두 비우고 차가운 냉수 한잔도 비우고 책을 챙겨 카페를 나온다. 그래... 이겨내야 한다. 기껏해야 귀 한쪽이 아픈 거뿐이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고통일 뿐이다. 어느덧 석양이 내려앉은 익숙한 그 길을 큰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어본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본다.




아네고 에미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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