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작하기 좋은 계절

by anego emi

드디어 봄이 왔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햇살이 포근하다. 이 봄이 오기 전에 나는 두 번의 심한 감기를 앓았고 동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먹어도 통 효력이 없는 것 같은 약들을 한 봉지 가득 약국에서 사야 했다. 매 끼니마다 뜨거운 미소 국물에 밥을 억지로 말아 꾹꾹 넘기면서 감기란 녀석에게 나이 탓에 떨어진 면역력에 대한 분노와 서글픔을 토로했다. 서울에서 라면 주사 한방이면 끝날 흔한 감기를 한 달 내내 골골되며 견뎌냈다. 정말로 시간은 약이 맞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가자 지겹던 감기도 지나갔다.


개나리 꽃이 몽글몽글 봉오리를 피던 날... 정들었던 15살 어린 룸메이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신라면 4 봉지와

참치 캔 2개 그리고 스팸 1 통과 조미김 몇 박스를 나에게 이별의 선물로 안기고 나와 뜨거운 포옹을 하고 핑크빛 케리어를 끌고 사라졌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잠시 찬기운이 돈다. 꼭꼭 닫았던 창문을 활짝 열고 방청소를 했다. 그리고 나는 새 룸메이트가 오기 전에 독립을 결심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길었던 혹은 짧았던 조금이라도 정이든 인연과 헤어지는 것은 나에게 아직까지 슬픈 일이다. 어학원의 같은 반 동생에게 부동산 소개를 부탁했다. 그는 부산에서 완구회사를 다니다가 온 동글동글 인상이 좋은 30대 초반의 친구이다. 대학시절부터 일본을 동경했던 그는 일본어를 정말로 일본인처럼 구사했고 그 덕에 나는 인심 좋은 부동산 주인을 만나 변두리의 조그만 맨션에 집을 얻게 되었다. 물론, 많은 것을 내려놓았고 내가 처한 현실을 인정했고 불필요한 욕심은 사치라는 것을 가슴속에 꼭 품었기에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역에서 나오면 알록달록한 시장거리가 펼쳐지고 꼬불꼬불 작은 골목들이 있고 그중 한 골목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의 새 보금자리인 4층짜리 맨션이 나온다. 부동산 아저씨는 무엇보다 치안이 제일 중요하다며 주변에 출장 경찰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만하면 꽤 괜찮은 선택이라고 나를 토닥이신다. 그리고 '도쿄에서 보낸 너의 시간이 좋은 추억이 되고 그저 편안했으면 좋겠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에 사과 하나가 쿵하고 떨어진다. 고마운 분이다. 그 흔하디 흔한 말 한마디에 가슴이 이토록 뭉클해져 보긴 오랜만이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가 전부인 나는 어학원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한번에 옮기고 꼭 필요한 가전제품과 가구들은 동네 중고 가게에서 모두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도쿄 핸즈에서 큰 맘먹고 산 오렌지색 체크무늬 커튼과 파란 물방울의 샤워 커튼을 달고 나의 새로운 공간을 흐뭇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둘러본다. 그래 이만하면 살만 한 거야. 꽤 근사한 거야. 그 이상은 무리인 거야. 그리고 다시 시작인 거야. 새 봄과 함께...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잖아?


3월 말부터 서서히 피기 시작한 벚꽃은 4월과 함께 발길 닫는 곳 여기저기에서 만개했다. 영화 '4월의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어느 곳을 가도 길가에 벚꽃의 행렬들이 마음을 흔든다. 일본 사람들의 벚꽃 사랑은 참으로 대단했다. 하나미... 꽃놀이를 즐기기 위해 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은 음식과 술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그들만의 작은 연회를 즐긴다. 주위를 둘러보면 고기를 굽는 사람들도 있고 주문한 대형 초밥을 먹성 좋게 먹어 치우는 사람들도 있고 작은 밥상 같은 피자 앞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한 조각씩을 유쾌하게 나눠 먹는 사람들도 있다. 나 또한 사는 동네가 비슷한 어학원 동생들과 맥주 몇갠과 꼬치구이 그리고 야끼 소바를 사서 활짝 핀 벚꽃 구경은 잠깐이고 먹고 마시기에 바쁘다. '하나 요리 당고'라는 일본말이 있다. 그 뜻은 꽃보다 그 아래에서 먹는 당고... 달달한 떡꼬치가 더 우선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에서도 리메이트 된 일본의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도 일본어로 '하나 요리 당고'이다. 남자라는 일본어의 발음도 당고이다) 평소에 감정표현이 별로 없는 개인주의인 일본 사람들은 벚꽃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지인들과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봄에 흠뻑 취한다. 어느덧 지는 해와 함께 봄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에 벚꽃 비가 내린다. 취기가 올라 발그스레해진 내 볼 위에도 꽃잎이 덜어진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역시 계절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아직도 낯선 이곳의 봄 앞에 나는 오늘... 맥없이 무장해제되고 만다.



아네고 에미

<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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