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직이라고 믿었던 회사를 떠났다. 아니 일을 떠났다. 내 책상 뒤로 쌓인 수북한 서류더미와 책들을 매일 밤 야근하듯이 조금씩 정리했다. 아끼는 후배들에게 나의 비밀노트도 물려주고 바이블처럼 보던 책들도 짧은 편지와 함께 선후배들에게 보냈다. 18층의 높다란 건물 위에서 밤하늘을 내려다본다.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이 풍경도. 살가운 후배 녀석이 커피를 들고 와 내 옆에 선다. 그가 내민 커피에 입을 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이제 정말 끝이다. 나는 이곳을 떠난다. 내가 사라진 이 자리엔 또 누군가로 채워진다. 20살... 내 마음속에 그렸던 마흔 살의 당당한 커리어 우먼은 이제 사라진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가족들은 내 퇴사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네가 결정한 거니까... 니 나이가 한두 살은 아니니까.' 도쿄로 유학을 가 일러스트를 공부하고 싶다는 내 말에 동생은 웃는다. 언니는 멋진 결정이라고 거든다. 아빠는 말이 없다. 엄마는 '그래 잘하겠지. 너라면..' 나는 이 순간, 내 결심의 쐐기를 박아야 하는 순간임을 감지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하다 '평생 회사만 다닐 수 없잖아. 야근도 지겹고... 작가가 되고 싶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글은 내가 좀 쓰니까 (내가 믿었던 천직은 카피라이터였다) 그림만 배우면... 남은 일생 작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입에서 뱉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된다. 아니다. 이제 되어야 한다. 영화 속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되듯... 나는 도망갈 곳이 없다. 그렇게 내 인생의 2부는 작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8월의 도쿄는 숨이 막힌다. 큰 짐들은 엄마가 부쳐주기로 하고 당장 쓸 간단한 옷가지만 든 캐리어 가방 하나만을 끌고도 찌는 도심 속에서 유학원에서 알선한 기숙사를 찾아가는 길은 험란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다. 안내를 해준 친구가 걷낸 열쇠를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좁다란 일본 아파트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이 좁은 공간을 두 명이 나눠 쓴다는 것이 놀라울 일이다.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이 더위를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급히 샤워를 하고 가방을 풀기도 전에 지갑을 챙겨 들고 동네 슈퍼로 향했다. 물 한 통과 맥주 두 캔을 샀다. 어느덧 해는 지고 하늘의 노을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가게 앞 밴치에 앉아 맥주를 딴다.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가게 할아버지는 땅콩과자 하나를 건넨다. 그리고 웃으신다. 나의 도쿄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대도 없었지만 이건 실망도 아니고 좌절도 아니고 그저 황당함과 멍함이다. 나... 잘 해낼 수 있을까? 왜 갑자기 도쿄에 와서 이 고생일까? 무슨 생각으로 도쿄에 온 거야? 너는....
15살이 어린 룸메이트가 저녁 늦게 기숙사로 왔다. 기숙사라고 해봐야 유학원에서 렌트한 조그마한 아파트다. 일본은 외국인에게 집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유학원에서 몇 개의 아파트를 렌트해 유학생들에게 기숙사라는 이름으로 빌려준다. 결코 싸지도 않은 가격에 시설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러나 유학생들에겐 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당장 일본어도 학교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나의 룸메이트는 에너지가 넘쳤다. 그리고 이 후덥 한 날씨를 무척 즐기는 듯했다. 그녀 덕에 조금 기분이 밝아졌다. 그다음 날부터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영화 속에서 처럼 비가 억수같이 왔다. 앞이 안 보인다. 오전 반인 그녀가 어학원으로 떠나고 혼자 집을 지키며 멍하니 창밖을 본다. 노트북을 꺼내 음악을 틀고 일본어 책을 펼친다. 또 멍해진다. 내가 여기로 온 것은 잘한 것일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좀 창피하긴 하겠다. 가족들에겐 뭐하고 하지? 회사 사람들에는? 그렇게 말리는 일을 저지르고 결국 다시 돌아온 나에게 그들은 뭐라고 할까? 아... 아... 아니다. 날씨 탓이야. 이 장마가 끝나고 학교가 시작되고 도쿄에 가을이 오면 일드 속 한 장면처럼 멋진 일들이 날 기다릴 거야. 난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다. 정신을 가다듬자. 일 년 안에 일본어를 끝내고 전문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그리고 일러스트를 제대로 공부하는 거다. 찬물 한 컵을 원샷을 하는 순간... 초인종이 울리고 엄마가 보낸 짐들이 도착했다. 너무나 친절한 일본 우체국 직원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짐의 개수도 수차례 묻고 짐이 무거우니 방안까지 옮겨다 주고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치면 사라진다. 차곡차곡 내가 싼 짐과 엄마가 보낸 여름 이불 등을 꺼내 정리를 하고 허리를 편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비가 그치고 하늘은 파랗다. 그래... 마트라도 갔다 오자. 귀여운 룸메이트를 위해 카레라이스라도 해보자. 조심조심 집을 나와 마트로 향한다. 커다란 도쿄의 마트엔 없는 것이 없고 구경거리에 신이 난 나는 잠시 고민도 우울도 잊는다. 그리고 카레라이스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고 맥주 몇 캔도 사고 일본식 맥주 안주인 삶은 콩도 한 주먹 사고 마트를 나선다. 그 순간 또 비가 억수같이 온다. 양손에 든 무거운 봉지를 잠시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하늘을 본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속에서 후덥 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목이 탄다. 봉지를 뒤적거리고 맥주 한 캔을 꺼내 딴다. 그리고 또 벌컥벌컥 마신다. 그런 나를 누군가 빤히 본다. 비를 그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손님이다. 나와 눈이 마두 치자 빙긋이 웃는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 " 이런 날씨엔 맥주만 게 없어요... 그렇지요? " 나는 웃는다. 아.. 비가 얼른 그쳐야 할 텐데. 이 장마는 언제까지 일까? 담주부터 어학원도 가야 하는데... 나는 이 장마가 끝날 때까지 도쿄에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까?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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