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하늘색을 진정 경험하고 싶다면 도쿄의 하늘을 보라고... 주택가 옆을 지나가는 덴샤의 낯선 소음에 어김없이 아침 일찍 눈을 뜬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다. 그러고 보니 새소리도 들린다. 어제 비가 온 탓인지 하늘이 너무나 투명하다. 아침의 하늘은 이런 색이었구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녹차를 꺼내 한잔을 금세 비운다. 그래... 오늘부터 시작이다. 드디어 어학원이 개강하는 날이다. 아무래도 공부하는 것이 더 쉽지 않겠는가? 그 험한 사회생활보다 말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샤워를 하고 아침도 챙겨 먹고 학교로 향한다. 참고로 도쿄의 어학원들 소위 학교 같지 않다. 그저 우리 동네 보습학원 수준의 작은 건물과 좁은 교실과 학생들로 바글바글거린다. 처음 레벨테스트를 받으러 갔을 때의 충격은 엄청났다. 유학원에서 보여준 안내책자 속의 건물과 너무나 차이가 남은 물론, 차고 넘치는 한국 학생들과 시끄럽고 번잡한 주위 환경들이 나를 작은 한숨과 함께 침묵하게 했다. 그래... 다 내가 선택한 일이다. 받아들여한다.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일본어 능력시험 2급을 얼른 패스하고 일러스트를 배우기 위해 전문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내 목표일 뿐. 이곳에 온 한국 학생들은 학업보다는 아르바이트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학교는 그저 핑계일 뿐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러 뿔뿔이 사라진다. 저러려면 왜 이곳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인 한국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내가 속한 클래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한국 학생은 나이가 제일 무거운 나뿐이다. 나는 그들과의 공통점이 없다. 학교가 끝나면 머리가 멍하다. 오랜만에 수업이라는 것을 하루 종일 듣고 집중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차가운 아이스커피 한잔을 들고 지는 해를 보며 잠시 걷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인트로에 나오는 신주쿠의 초입이 보인다. 하나둘 불들이 화려해지고 퇴근하는 사람들과 호객을 담당하는 소위 '삐끼' 오빠 언니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순식간에 해는 지고 도심은 현란한 불빛과 함께 새로운 모습이 된다. 도쿄는 참으로 낮과 밤의 풍경이 다르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어지럼증이 온다. 잠시 가만히 주저앉고 만다. 그리고 또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길 한가운데 주저앉은 나를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간다. 그저 그런 나를 아무렇지 않게 그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방치해둔다.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시간은 뭘 하든 안 하든 흐른다. 속도의 차이일 뿐. 학교와 집 그리고 동네 마트와 문방구... 가끔 휘청거리는 신주쿠를 쳇바퀴 돌며 두 계절을 보냈다. 그리기도 어려운 한자들은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기 일 수이고 이상하게 생긴 가타카나와 쓰는 것과 읽는 법이 다른 이 두얼 방식의 일본어에 나는 서서히 적응 중이다. 학교에서 친한 동생들도 몇 생겼고 선생님들과 가끔 어설픈 수다를 떨고 옆집으로 새로 이사 온 한국 여인과 금요일 밤이면 동네 이자카야에 가서 맥주도 한잔하게 되었다. 일본은 우리와 참 다르다. 사는 방식도 생각하는 방식도. 소심하고 낯가림이 심한 이들이 어떻게 어마 무지한 경제 대국이 되었을까? 그들이 만들어낸 놀라운 디자인과 건축물들은 볼 때마다 감동이지만 도대체 이런 걸 만드는 애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매일 얼굴을 부딪히는 저들 속에 있기는 한 걸까? 오늘도 학교 앞 카페에서 숙제를 하다가 좁은 테이블을 하나씩 끼고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일본 사람들을 가만히 둘러본다.
도쿄의 겨울은 밖보다 안이 춥다. 전기요금이 비싼 일본은 히터를 마구 틀 수도 없고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장판에 폭 파묻혀 오들오들 떨며 잠들어야 한다. 도쿄의 아무리 좁은 집도 다 화장실엔 욕조가 있다. 다리를 쭉 펼 만큼 길지도 않은 네모난 이 욕조는 한국의 욕조보다 깊다. 뜨거운 물을 받고 입욕제를 넣고 몸을 담그면 순간 노곤해진다. 다양한 종류의 입욕제를 하나씩 골라 매일 바꿔 쓰는 것도 목욕의 즐거움이다. 단... 매일 그렇게 목욕을 하다 보면 가스비가 또 엄청난 충격으로 온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 목욕은 구원이자 겨울을 나는 즐거움이었다. 목욕 후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잔은 아... 오늘도 내가 잘 벼텄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한 작은 행복이었으니까. 서울에선 입어 본 적이 없는 도톰한 잠옷을 입고 수면양말도 신고 매트리스 위에 전기담요와 캐시미어 담요를 깔고 도톰한 이불 동굴을 만들어 쏙 들어가 몇 페이지의 책을 읽다 잠이 든다.
12월의 도쿄는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으로 눈부시다. 11월 중순부터 부지런히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해 도시는 분주히 움직인다. 핫스폿인 롯폰기와 시부야를 비롯해 신주쿠와 오다이바의 일루미네이션은 해마다 이슈이다. 심지어 일루미네이션 투어를 하는 관광버스도 있다. 도쿄에 사는 우리는 틈 날 때 다리품을 팔면 이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 이 화려한 장식들은 25일...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깜쪽 같이 사라진다. 그리고 조용하고 차분히 새해를 준비한다. 학교는 짧은 겨울 방학에 들어가고 처음 맞는 도쿄에서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룸메이트와 나는 작은 파티를 연다.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처음으로 두 손 모아 새해의 소원을 맨 정신으로 빌었다. 서울에선 늘 취해서 잠들면 새해였으니까. 새해엔 아프지도 약해지지도 말고 나를 위해 한걸음 더 씩씩하게 나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한 살의 나이를 먹는다.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와 함께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자라난다. 떨어지는 암기력도 나이와 함께 사라지는 것 중에 하나이며 마음을 다 열지 않아도 세상과 꽤 그럴듯하게 어울릴 수 있는 노련함도 나이와 함께 자라난 것 중에 하나이다. 새해 첫날의 하늘은 너무나 눈부시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투명하다 못해 맑은 바다 같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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