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마지막... 수학여행을 떠나다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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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의 크리스마스엔 첫눈이 왔다. 새벽녘에 소복소복 아무도 모르게 눈이 쌓였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후배들이 보내 준 소설책을 꺼내 들고 한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기고 도쿄에서의 두 번째 크리스마스가 나에게 말을 건다. 잠깐 감상에 빠진 나는 노트북에 담아 온 추억의 음악들의 볼륨을 높이고 냉장고를 뒤져 맥주 한 캔을 찾아낸다. 조심스레 한 모금을 넘기고 커튼을 여니 눈이 온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거리에 얌전히도 눈이 내린다. 한참을 멍하니 눈을 본다. 도쿄는 눈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새벽에 첫눈이 내린 것이다. 순간, 몇 살만 어렸어도 아직 청춘의 낭만이 게으르고 무거운 몸을 지배하기 전이였다면 아마도 코트를 꺼내 입고 집 밖으로 돌진했으리라. 그러나 내 몸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때 한쌍의 커플이 애써 참아내려고 해도 터지고야 마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로 귀를 간지럽히며 평화로운 하얀 눈밭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커튼을 닫고 두 눈이 허락될 아주 작은 공간만 열어두고 그들을 훔쳐본다. 추억의 영화인 '러브 스토리'를 능가할 행복한 장면을 연출하는 중이다. 맥주 한 모금을 다시 삼키고 노트북 앞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어폰을 꽂아 볼륨을 높여본다. 눈을 감자 나는 어느덧 20살의 크리스마스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새해가 밝았고 나는 어학원을 졸업했고 전문학교 일러스트과에 입학을 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몇 번의 수업 전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고 여러 선생님들과의 자유로운 면담시간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의 이력과 용기에 매우 고무적이었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과의 마지막 면담 날. 선생님은 수학여행을 가야 한다며 안내문을 건넸다. 그 순간,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나는 '정말입니까?'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선생님은 당연히 가야 한다고 했다. 같은 반은 물론, 다른 학생들과도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뭐... 같이 수업도 듣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다 보면 친해질 터이니 수학여행만은 제발 빼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은 단호하게 이것도 수업의 연장이라며 꼭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 나이에 내 나이의 반토막인 애들이랑 수학여행이라니. 게다가 6명이 한 반 방을 쓰게 되는 것은 기본이고 같은 방 친구들이랑 해야 하는 과제부터 자기소개 시간까지 낯설고 어색한 이벤트들이 줄줄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래. 까짓것... 대충 하면 된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숨어있다가 돌아오면 그만이다. 3월 첫 주에 떠난 2박 3일의 수학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도쿄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간 것도 고속버스 휴게소의 넘치던 간식거리도 그리고 큰 식당을 통째로 빌려 전교생이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며 먹던 3단 도시락도 버스 안에서 끝없이 웃고 자지러지던 시부야 걸들의 수다도... 나에겐 그저 이색 체험이었다. 드디어 도착한 숙소. 우리나라로 치면 큰 콘도 같은 곳의 로비에 모두 모여 방배정을 기다린다. 왠지 그 무리 속에 내가 껴있는 것이 쑥스러웠다. 슬그머니 무리들과 떨어져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선생님들의 추후 일정에 관한 설명이 시작되었고 키를 나눠주기 위해 이름을 호명한다. 나는 내 방 번호를 확인하고 일어서는 순간, 호텔 직원이 나를 보며 '선생님들은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헉... 맞다. 잊고 있었다. 나는 누가 봐도 선생님 혹은 학부모의 비주얼과 나이란 것을. 게다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니 더욱더 그럴 것이다. 머쓱해진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 무리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그래.. 차라리 이게 속 편한 거구나.


소심하고 예의 바르고 순진한 19살의 그녀들과의 2박 3일은 신선했다. 아침저녁에 제공되는 따듯하고 푸짐한 뷔페도 맛있었고 여행 중에 방문한 미술관도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었던 옛 정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시골 마을도 좋았다. 조금 친해진 같은 방 친구들과 우르를 몰려가 사 먹은 구운 떡도 어묵도 라면도 너무 맛있었다. 게다가 한류의 덕분으로 일본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언니에게 관심과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개학을 했고 함께 방을 쓴 친구들과 수학여행에서의 감상을 표현하는 작품으로부터 수업은 시작되었다. 정말 그들은 그저 학교에 오는 것이 마냥 신나 보였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소위 오타쿠 이거나 말썽쟁이 이거나 존재감 없는 아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에 작은 호기심을 보이는 그들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사랑이란 이름의 특별한 기회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들이 이 학교에 온 가장 큰 이유다. 물론, 유명 미대를 다니다가 일러스트나 만화를 그리고 싶어서 다시 입학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학교와 국가는 그런 아이들과 부모를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의 관심을 기초로 한 기술을 가르쳐 졸업을 시키고 그것을 토대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일본 전문학교의 본질이다. 나 또한 그중의 하나인 학생일 뿐이다. 그들과 같이 백지상태가 되어 수학여행 때 찍어온 사진을 오리고 붙이고 색연필로 주변을 장식하고 마카펜으로 스토리를 만든다. 재미없는 아이들의 농담에 억지웃음을 짓고 그들과 낯설어지거나 멀어지지 않기 위해 그들의 페이스로 조금씩 조금씩 한발 한발 나아가도록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세상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에서 일하던 것처럼 주변을 닦달해서도 함부로 평가해서도 무작정 앞서가려만 해서도 안된다. 지금이야 말로, 그들과 함께 내가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누구보다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하는 순간이다. 나고야에서 온 엄마가 한국인인 유끼에 짱이 내 옆으로 바짝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한다. ' 오네상... 아니..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언니의 차분함과 어른스러움이 너무 멋져 보여요. 언니 옆에 꼭 붙어 있고 싶어 지는데...' 막내 동생처럼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도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1호 클래스 메이트가 되었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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