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간다. 졸업작품 준비로 마음이 더 분주한 어느 가을의 금요일 밤. 예고도 없이 한국의 지인들이 도쿄로 훌쩍 날아왔다. 일에 지친 그들은 늙은 유학생인 나를 응원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모으고 마음을 모으고 얼마 남지 않은 가을에 대한 아쉬움을 모았다. 그리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마냥 들떠있는 내 앞에 짠~하고 나타났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손을 끌고 언젠가 그 누군가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나의 소중한 도쿄들을 바쁘게 펼쳐냈다. 그리고 가을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던 마지막 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인 요코하마로 향했다. 시부야에서 급행열차를 타면 30분이면 거뜬히 도착하는 곳. 탁 트인 바다와 아름다운 석양을 보며 캔맥주 한 캔을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곳. 해가지면 대관람차의 화려한 불빛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설레게 되는 곳. 그곳은 바로 아무리 가도 질리지 않은 나의 요코하마다. 나의 요코하마 투어의 첫 번째 코스는 언제나 차이나타운이다. 도쿄에서 만날 수 없는 붉은빛이 넘실거리는 요란한 상점가를 거닐며 주먹만 한 왕만두도 사 먹고 만두의 달인이 만드는 육즙이 가득한 소롱포도 한 접시 사서 호호 불어가며 차가운 우롱차와 함께 먹는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골목골목을 누비다 보면 손금과 관상을 보는 점집들이 길게 늘어선 차이나 타운의 명소인 손금 거리를 나온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주팔자에 관심을 갖는 것만큼 손금에 대한 관심이 많다. 아침이나 주말에 방송되는 버라이어티 티브 쇼에는 반드시 유명인의 손금을 봐주는 코너가 있다. 주인공의 손바닥을 확대해 티브 화면 가득 잡고 빨간 줄을 이리저리 그어가며 손금풀이를 해주는데 나도 그들을 따라 내 손금을 풀어 본 적도 있다. 나는 차이나 타운을 떠나기 전에 꼭 이 손금 골목에 들러 지인들의 손금을 보게 한다. 물론 재미 삼아다. 가격도 천 엔 정도이고 바다 건너 먼 곳에서 날카로운 눈매의 중국 할머니가 봐주는 손금풀이는 제법 흥미진진하니까. 마침 상담이 끝난 후라 우리는 대기 없이 바로 할머니의 테이블에 둘러않아 차례로 손을 내민다. 할머니는 지인들의 손금을 표정의 흔들림 없이 차분히 읽어내고 나는 부지런히 통역을 해준다. 제법 풀이가 척척 맞아가는지 지인들의 눈이 점점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한다. 모두의 손금풀이가 끝나고 궁금했던 것들도 몇 가지씩 물어보고 계산을 하려는 순간, 할머니가 나를 보며 말한다. " 아가씨는 안보는 거야? 난 아가씨가 궁금한데... 통역하느라 고생했으니 아가씨 것은 내가 그냥 봐줄게."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고 그 순간 지인 중 하나가 " 맞아. 언니도 봐. 내가 내줄게. 이런 건 돈 내고 봐야 해. 공짜는 효력이 없어." 머쓱해진 나는 수줍게 손을 내민다. 솔직히 다른 가게에서 손금을 본 적도 있고 스스로 티브를 따라 해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할머니의 매서운 눈빛 앞에 벌써 기가 죽어 있었다. 혹, 저 무서운 얼굴로 나의 남은 인생에 관해 조금이라도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약하고 서글픈 마음에 나는 못 견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 손금을 뚫어지게 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보며 말했다. " 그간 이리저리 고생이 너무 많았네. 몇 년 전에 큰 변화가 있었어. 아가씨 인생을 확 바꿀.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평생 할 수 있는 일에 도움이 될 거야. 걱정 마. 재주가 많으니 사는데 문제없겠어. " 순간, 뭉클하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뭐랄까 섬뜩한 기분과 함께 놀라웠다. 그간의 아프고 힘들었던 나의 시간을 이 할머니는 어떻게 내 손바닥 위에 그려진 몇 개의 선을 보고 금세 알아내는 것일까? 주책맞게 뚝하고 떨어져 버린 눈물을 훔치는 나에게 할머니는 말했다. " 나이 들어 외국에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도쿄는 아닌 것 같아. 잘 생각해봐." 그리고 빙긋이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차이나 타운을 나와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해양 고원으로 천천히 걷는다. 우리의 얼굴 위로 기분 좋은 가을바람이 분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마음은 들뜨지도 요동치지도 않은 잔잔한 바다가 된다. 일요일 오후의 평화로운 풍경이 공원 곳곳에서 행복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고 우리는 공원 끝자락에 자리 잡은 편의점에서 요코하마 맥주를 한 캔씩 샀다. 그리고 우리는 긴 나무의자를 끌어 바다가 보이는 선착장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지는 석양을 봤다. 우리 모두 아무 말도 없었지만 이 순간 아마도 각자의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다시 꿈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결심했다. 꿈이라는 명분으로 이제 인생을 더 이상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고. 나를 괴롭히지도 혹사시키지도 비교하지도 닦달하지도 아프게 하지도 않겠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내가 지금 그리고 싶은 그림이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이 나의 새로운 꿈이 된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좋으니까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문뜩 요코하마의 할머니가 건넨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평생의 일이 된다는 말에 나는 생각도 하기 싫었던 꿈이라는 단어를 바보처럼 다시 떠올렸다. 그리운 것인가? 다시... 꿈을 좇던 그 시절이.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그 후...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졸업작품에서 장려상을 받은 것이다. 작품심사 최종일에 교실 앞에 붙은 최종 수상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리둥절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와 덥석 손을 잡는다. 우리 과 조교다. " 상 받을 줄 알았어. 너무 좋았어. 김상이 만든 에세이북. 나도 하나 갖고 싶을 만큼... "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과 내 작품을 응원해주던 많은 사람들의 축하 메시지를 넘치게 받고 학교에서 마련해주는 전시회에 참가하라는 공문을 손에 꼭 쥐고 집으로 가는 덴샤를 탔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멍하니 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처음으로 내가 진심으로 기특했다. 그리고 행복했다. 그리고 두 손을 꽉 쥐어본다. 다시 꿈 따위는 꺼내지 않아도 좋아. 남은 생은 그저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쓰고 싶은 것을 쓰면서 살아갈 거니까.
-마흔 살에 떠난 일본 유학기 완결 -
< 지금까지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