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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Apr 25. 2024

여름을 닮은 룸메이트

“ 언니, 저는 요 … 도쿄의 여름이 너무 좋아요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나보다 13살이나 어린 그녀는, 이 끈적끈적하고 후덥하고 숨 막히는 이곳의 여름을 청춘이라는 핫핑크 원피스를 입고,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건강미 넘치는 커피 우윳빛 피부는 땀 따위는 그냥 흡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뽀송뽀송하게 빛나고 있었고, 머리 위로 동그랗게 말아 올린 밝은 오렌지빛 머리카락뭉치는 유명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덩어리처럼 달콤해 보였다. 여름은 언제나 누군가의 청춘을 눈부시게 한다. 그와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청춘이 아님을 군말 없이 인정하게 한다.


귀가 얼얼해지고 귓가에 빗물이 고일만큼 지독하게 비가 내린다. 이 비를 뚫고 친구와 쇼핑을 나간 나의 룸메이트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나는 작은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를 서성인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용쾌 공간을 찾아내고 그 공간에 나무를 심고 꽃을 가꿔 화단 같은 정원을 만들어 낸다.  이것 또한 건축의 일부인가?  


까무룩 낮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이참에 마트라도 다녀올까? 참, 엄마가 보낸 두 개의 이민가방이 오늘쯤이면 도착할 터인데… 꼼짝 않고 기다려야 하나? 룸메이트에 의하면, 일본의 우체국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여 행여나 부재중일 경우에 쪽지를 남겨놓으며, 그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ARS안내에 따라 원하는 날자과 시간을 정하면 다시 배달해 준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일본어다. 겨우 초보 대화 수준인 내가 전화기의 안내 멘트를 척척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맞다. 룸메이트에게 부탁을 하면 그만이지 않은 가?


서둘러 에코백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조심조심 옮긴다. 혹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길잡이가 될만한 포인트에 잊지 않고 사진도 찍어둔다. 이것은 디지털세대인 룸메이트의 조언이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도쿄의 멘션들과 주택들은 나에게는 틀린 그림 찾기처럼 헷갈린다. 역으로 가는 초입에 커다란 마트가 보였다. 괜스레 가슴이 설렌다.  언제부터인가 백화점보다 마트 가는 것이 더 신난다. 먹고사는 건 마트가 최고다.


호기롭게 플라스틱 바구니가 아닌 큼직한 커트를 밀며 씩씩하게 마트로 들어섰다. 대형마트는 아니지만 오늘 저녁 찬거리는 물론이고 필요한 것을 장만하기엔 충분했다. 처음 보는 일본  식재료들과 시판용 초밥, 각종 밑반찬들 간단한 안주거리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  도쿄에 온 후 처음으로 식욕이 돋는 순간이다. 그래, 오늘 저녁 메뉴는 카레와 맥주다. 참, 이 삶은 풋콩도 빠질 수 없겠지? 이건 애피타이저잖아. 그럼, 그럼….


두 개의 비닐봉지에 산 것들을 나눠 담고 커트를 제자리에 밀어놓는 순간, 차양 위로 우두둑우두둑 굵직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순식간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센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올 때 우산 챙기는 것을 깜빡했다. 분명 며칠 만에 그친 비에 마음이 급해으리랴.


나는 양손에 든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렇게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내리는 비 때문에 뿌옇게 가려진 세상은, 마치 심술이 난 어린아이가  회색빛 크레용으로 덕지덕지 덧칠을 해놓은 것 같다. 비릿한 물냄새와 함께 후덥지근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갑자기 목이 타들어 간다. 부스럭부스럭 비닐봉지 속에서 몽글몽글 땀방울을 머금은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내고 무심하게 뚜껑을 따 입으로 가져간다. 벌컥벌컥 쉬지 않고 몇 모금을 삼키고, 도무지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은 굵은 빗줄기들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처럼 쪼그려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한쪽에 놓인 불룩한 비닐봉지… 그 또한 우산이 없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다. 머쓱해진 내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그는 찡끗하고 미소를 지으며 한 손에 든 맥주캔을 나를 향해 들어 보인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이 건배!”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났다. 나는 그를 향해 맥주캔을 들어 보인 후 남은 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역시,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이 건배!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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