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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May 02. 2024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

유학원에서 소개받은 어학원은 내가 대학시절에 다니던 영어학원보다 작고 볼품이 없었다. 과연 사진과 포토샵의 힘은 위대하다.  문득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고회사를 10년이나 넘게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원에서 보여준 안내책자 속의 사진과 실물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래도 이건 좀 정도가 심했다. 어쩐지 학비를 깎아준다고 할 때부터 감을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선택은 끝났고 결과는 내 몫이다. 


레벨 테스트를 받았고 당연히 초급반에 배치되었다. 초급반이라고 하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간단한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다. 선생님들은 모두 친절했고 결석만 하지 않으면 일본어는 금방 늘 것이라 하며, 초급반을 위한 교재와 도쿄생활에 필요한 서류와 증명서등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아주 느린 속도의 일본어였지만 나는 대부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다행히도 안내서가 친절하게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있어 적당히 ‘예’라는 대답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문제는 끝났고 개학은 일주일 후다. 남은 일주일 동안 나는 내가 사는 동네와 가까운 도쿄의 명소들을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 순간, 이방인으로 흔히 품게 되는 약간의 설렘과 기대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가을이 오고 있음에 틀림없다. 일주일 전, 나에게 언제나 활기를 불어넣어 주던 핑크빛 원피스의 룸메이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스팸 2통, 라면 4 봉지, 햇반 3개, 조미김 3 봉지, 즉석카레 2개를 깜짝 선물로 남겨놓았고 ‘ 언니, 잘 챙겨드시고 건강하세요. 꼭 원하는 학교도 가시고요’라는 살가운 메모도 잊지 않았다.


어학원에는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다.  오전반일 때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홀짝이다가  출근길의 모닝커피를 떠올렸고,  오후반일 때는 수업이 끝난 후 늬엇늬엇 해가지는 골목길을 걸으며 퇴근길의 맥주 한잔이 떠올렸다.  몸은 떠났지만 아직도 남은 마음이 그곳에 있다. 언젠가 남김없이 떠날 날이 올 것이다. 애써 서두르지 않아도 좋았다. 나는 앞으로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될 참이니까.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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