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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May 09. 2024

새 룸메이트

새로 룸메이트가 왔다.  키가 작고 아담한 그녀는 씩씩한 소년처럼 다부져 보였다.  내가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하자, 크고 거친 손이 내 손을 꽉 쥐고 흔든다. 유난히 떡 벌어진 어깨에 내 시선이 꽂혔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도쿄로 왔다고 했다. 그전의 룸메이트에 비해 말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 침묵했고,  혼자 쇼핑가는 것을 좋아했다. 놀라운 것은 매번 옷을 사 오는데  그녀는 정말로 옷이 많았다. 제법 깊이가 있고 널찍한 벽장의 하단을 그녀가 사용했는데, 겨울옷을 제외하고  나머지 옷을 다 넣어도 공간이 남았던 나와 달리, 한철 옷을 채워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꽉 찼다.  중요한 의식처럼 켜켜이 쌓인 옷을 꺼내고 넣을 때마다 그녀는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나라면 저 많은 옷들 중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조차 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녀의 옷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보였지만, 그럴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침마다 옷장문을 열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동대문 시장의 보세옷집처럼 층층이 쌓아놓은 옷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곤 했다. ‘ 입을 옷이 없어…’ 


오후반인 나는 이불속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하며 그녀를 몰래 훔쳐보았는데, 그녀는 망부석처럼 한참을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다가 옷가지 몇 개를 꺼내서 바닥에 펼쳐놓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또 다른 옷가지 몇 개를 더 꺼내서 펼쳐보기를 서너 번 반복한 후에, 그것들을 들고 욕실로 사라졌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고심을 해서 고른 옷들이 매번 내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 제법 통통했던 그녀의 몸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점퍼와 후드티, 레깅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두 번 감고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머플러… 작은 그녀는 옷에 완전히 파묻히고 뒤뚱뒤뚱 옷더미들이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유난히 선택의 시간이 길었던 날이면 여지없이 그녀는 새 옷을 사 왔다.  매번 이런 행동을 그녀는 반복했다. 


나는 카레라이스와 함바그스테이크를 자주 만들어 먹었는데, 매번 함께 밥을 먹자고 상을 차리는 나에게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 언니, 전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 먹으면 안 돼요.”


그녀가 식사 대용으로 먹는 것은 한국에서 보내준 견과류가 촘촘히 박힌 직육면체의 떡이었다. 그것을 그녀는 오물오물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씹어서 삼켰다. 맛있는 것이 넘치는 미식의 도시 도쿄에서 먹는 것을 참는 것은, 놀이동산에서 놀이 기구를 못 타는 것과 같을 터인데, 그녀는 용쾌 잘 참고 버티는 듯했다. 나는 그녀가 집 밖에서는 몰라도 집안에서 지우개 같은 떡 이외의 다른 것을 먹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두 젊은 룸메이트들은 도쿄를 사랑했다. 첫 번째 룸에이트는 도쿄의 화려함과 생기를 … 두 번째 룸메이트는 도쿄의 우울함과 고독을… 그리고 나는 그녀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들에게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침마다 내뿜는 그녀의 한숨이, 주린 배를 참아내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옷의 무게에 눌린 축 처진 그녀의 어깨가, 나를 우울하게 했고 이유도 없이 집 앞을 혼자 배회하게 했다. 하루에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람이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곧 겨울이 올 것 같았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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