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과 문법이 비슷해서 어학원을 부지런히 다니면 쓰기와 읽기는 자연스레 늘기 마련이다. 듣기도 유사한 발음의 단어들이 많아서 영어보다 알아듣기가 쉬운 편인데 문제는 말하기다. 도쿄 사람들은 타인과 말하기에 매우 인색한 편이며, 가게에 물건을 사러가도 먼저 와서 설명을 하거나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어학원을 나서는 순간, 내가 하는 일본어는 고작 다음의 몇 마디뿐이다. “ 얼마입니까? 감사합니다. 이걸로 주세요. 카드 사용됩니까? …”
담임 선생님이 구청에서 운영하는 한일교류문화강좌에 참석해 보라고 했다. 한국어를 배우기를 원하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시간이 있는데, 신청을 하면 약간의 교재비를 내고 일본인과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물론, 의사소통은 일본어가 기본이고 한국어에 관심이 많으니 부족한 어휘력은 한국어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서로에게 각자의 언어를 가르쳐주며 각자의 나라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할까?
“ 저는 한국을 너무 좋아합니다” 문화강좌에 참가신청을 하고 처음으로 나와 매칭이 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가 한 첫마디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일본의 유명 화장품회사에 다니는 그녀는 한국남자와 교재 중이었고, 점점 그에게 빠져드는 만큼 한류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유쾌하고 다정한 그녀는 수업이 끝날 무렵 대뜸 나에게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지 물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와 팔짱을 끼고 역까지 수다를 떨며 걸어갔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일본인 친구가 생겼다. 그 후 그녀와 나는 한 달에 서너 번씩 만나 밥이나 술이 마시며 서로의 언어를 탐독했다. 신기하게도 그녀 앞에서는 일본어가 줄줄 잘만 나왔다. 언제나 나에게 눈을 맞추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그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시부야에 가서 크리스마스 카드도 몇 장 사고 듣고 싶었던 시디도 몇 장 골랐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부야는 해가 지자 눈부신 네온사인 불빛아래 인파로 넘쳐난다. 오늘은 나도 저 인파 속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첫 일본인 친구다. 3천 엔을 내면 두 시간 동안 와인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나 만큼이나 애주가인 그녀는, 가성비 좋은 술집들을 많이 알고 있었는데 와인을 좋아한다는 내 말을 잊기 않고 기억해 두었는지 연말 모임은 와인으로 맘껏 취해보자고 먼저 제안을 했다.
무제한으로 나오는 와인치고 질이 좋았고 타파스 스타일의 안주들은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다. 무엇보다 인테리어가 특이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거울이 큰 창문처럼 홀의 벽 정중앙에 걸려있었고,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본듯한 정체불명의 석조 조각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북적되는 밖과 달리 레스토랑 안은 한적했다. 그녀와 나는 두 시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실컷 와인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했다.
“ 언니, 나 막차는 12시 반이야… 지금 10시니까 두 시간은 더 마실 수 있어. ”우리는 조금이라도 집으로 가기 수월한 신주쿠에 있는 아이리쉬 펍에서 맥주를 몇 잔 더 마시기로 했다. 서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 지하의 펍은 그녀의 오랜 단골가게이다. 익숙하게 매니저와 인사를 하고 카운터 앞의 두 자리를 겨우 차지했다. 맛소금이 솔솔 뿌려진 짭조름한 튀긴 파스타면을 안주로 먹으며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비워냈다. 그때 한 남자가 카운터에서 맥주를 주문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씽긋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말했다. “ 혹시 한국사람이에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주문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자신은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데 동료들과 술을 마시러 왔다고 했다. 괜찮다면 우리에게 맥주를 한잔 사고 싶다고 말했다. 내 옆의 그녀는 공짜술은 언제나 오케이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과 같이 맥주를 마시며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맥락 없는 이야기들을 이어가다가 막차 시간에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친구들은 몇 잔 더 마시고 택시를 불러 가겠다고 했다. 계산을 하는 나에게 그는 다가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 술친구가 필요하면 연락해도 좋아요. 전 한국친구가 아직 없거든요. 당신의 내 첫 번째 한국친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의 첫 번째 한국 친구가 되었고 그는 나의 두 번째 일본 친구가 되었다.
<아네고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