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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May 16. 2024

마음이 활짝 웃는 날

“ 안녕하세요, 옆집에 새로 이사 왔어요.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세련된 단발머리를 한 귀여운 얼굴의 새 이웃이 생겼다. 그녀 또한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며, 대학원 진학을 위해 도쿄로 왔다고 했다. 룸메이트와 달리 그녀는 쾌활하고 수다스러웠다. 그녀가 어쩌다 우리 집으로 놀러 와 자잘한 일들을 털어놓을 때면 나는 왠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키가 작았지만 비율이 좋은 몸매의 그녀는 반바지와 부츠가 잘 어울렸다. 금요일 밤이면 그녀와 나는 팔짱을 끼고 함께 장을 보러 갔다. 먹는 걸 좋아하는 그녀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고, 오늘 저녁은 자신의 집에서 함께 먹자고 졸랐다. 나는 집에 혼자 있을 룸메이트가 잠깐 마음에 걸렸으나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니까. 


새 이웃 덕분에 나는 조금씩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어쩌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녀의 집으로 건너가 수다를 떨기도 하고, 동네 초입에 있는 작은 술집으로 맥주를 마시러 가기도 했다. 늘 지나다니면서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었던 그 작은 술집은, 그녀와 내가 이사를 가기 전까지 토요일 밤이면 반드시 들리는 단골 술집이 되었다. 


디긋자 모양의 카운터에 동그란 10개의 의자 그리고 홀에 놓인 작은 두 개의 테이블 … 스무 명도 채 들어가지 못하는 이 작은 공간은,  이 동네 토박이들의 사랑방이자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우리가 그곳에 조심조심 발을 들여놓았을 때, 주인아저씨는 환한 미소로 반겨주며 구석자리를 내어주었다. 그가 내민 메뉴판에는 붓팬으로 갈겨쓴 한자로 가득했고,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우리를 위해 준비한 재료들을 쭉 보여주였다. 그녀와 내가 수줍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닭꼬치 구이를 정성껏 구워주며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적당히 거품을 머금은 생맥주는 너무나 맛있었고 꼬치구이 또한 살점이 부드럽고 육즙이 살아있어 씹을수록 담백했다. 우리는 한 잔을 금세 비우고 또 한 잔을 주문하고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인지 서로를 마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런 우리를 빤히 보던 야구모자를 쓴 중년의 아저씨는 잔잔하고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 한국 사람입니까?”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 아하… 저는 한국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요. 한국  음식도요.” 잠시 후, 아저씨의 여사친이 왔고 연이어 아저씨의 이웃이 왔고 이웃의 친구가 또 왔고… 어느새 가게 안은 사람들로 꽉 찼다. 모두 동네 사람인 듯 서로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주를 스스럼없이 나눠먹었다. 물론, 까막눈인 우리가 주문할 수 없는 별미안주들을 기꺼이 우리에게도 나눠주었다.  모두 각자의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신기하게도 함께 기분 좋게 취했다. 


다음날,  주머니 속에는 포스트잇 크기의 종이조각들이 가득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쿠폰들이었다. 쌀 10% 할인, 야채 배달무료, 세탁요금 10% 할인, 도시락 보너스 반찬, 타코야끼 3개 서비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젯밤 함께 술을 마신 유쾌한 그분들은 모두 이 동네 상점가의 주인들이었고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에게 본인 가게의 쿠폰을 쏘신 것이었다. 소박하지만 이웃의 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도쿄에서 마음이 활짝 웃는 첫날이었다. <아네고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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