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뭐… 글 쓰는 재주가 있으니 그림만 되면 더할 나위 없지. 그런데 왜 하필 도쿄야? 너 일본 별로라고 하지 않았니? 날씨도 별로고 집도 좁잖아”
오므라이스 때문에… 드라마 런치의 여왕에 나오는 그 오므라이스 냄새…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해주는 그 마법의 냄새가, 날마다 골목골목에서 새어 나온다면 근사하지 않겠어?
그때의 나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전혀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방치함으로써 얻는 해방감이라는 위로가… 날 것의 나에게 별 뜻 없이 인사를 건네고 가볍게 눈을 맞추며 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들꽃 같은 누군가의 미소라는 위로가… 경계는 사라지고 긴장은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며 인파에 휩쓸려 걷고 또 걷는 것만으로 하루가 사라지는 위로가 간절하게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곧 장마가 시작될 거예요. 비가 정말 무섭게 와요. 비가 오면 웬만하면 집에 계세요. 하긴… 집에 있기도 답답하시겠다. 좁고 덥고… 일본이 맥주가 그냥 맛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날씨에는 맥주 말고 당기는 것도 없어요. 이 후덥 한 날씨가 안주라면 안주랄까?”
유학원에서 소개해준 기숙사까지 나를 안내해 준 한국 유학생은 푹푹 찌는 8월의 폭염 속에서 연신 땀을 닦아내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나를 힐끔 거리며 끝없이 무어라 떠들었댔다. 그는 어색한 것을 못 견디는 부류임에 틀림없다. 나는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고 집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좁은 곡목길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사라지고 유학원에서 보여준 사진보다 훨씬 좁고 단출한 방안을 조심조심 둘러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회의실만 한 방의 한쪽면에 이 층침대가 놓여있고, 밥상인지 책상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테이블이 방 한가운데 놓여있다. 손때뭍은 낡은 선풍기가 시든 화분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창가 앞을 지키고 있다. 반쯤 닫힌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를 켰다. 미지근한 바람이 얼굴에 닿자 크게 숨을 내쉬고 나의 룸메이트가 될 그녀의 흔적을 찾아본다. 벽에 걸린 핫 핑크의 소매 없는 후드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그녀는 이 뜨거운 여름을 즐기는 법을 잘하는 핫 핑크의 청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하… 목이 타들어간다. 일단 맥주부터 한 캔 마셔야겠다. 맥주 두 캔 그리고 생수 한 병… 천 엔을 내고 잔돈을 주는 대로 건네받고 꾸벅 인사를 하는 나에게 인상 좋은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답례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돌아서는 나를 멈춰 세우며 세모모양의 땅콩 봉지 두 개를 무심하게 건넨다. 그리고 일본 드라마에서 익히 들어본 듯한 낮은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건 서비스!”
가게 앞에 놓인 긴다란 나무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따고 단숨에 몇 모금 쉬지 않고 마셨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든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물러 났건만 바람 한점 없다. 멍하니 올려다본 초저녁의 하늘은 울긋불긋 물들어 간다. 먼지 한 점 없어 보이는 저 투명한 하늘이 적당히 취기가 오른 내 얼굴 위로 곧 쏟아 내릴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또 다른 시작… 나는 또 다른 길의 출발점에 선 것일까? 아니면, 잠시 숨 고르며 몸을 풀기 위해 제자리 뛰기를 하려는 것일까? 모르겠다. 바야흐로 이곳은 낯설디 낯선 도쿄이고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이것이 팩트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