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타협만이 불행을 막는 길
내 인생중 가장 열정 넘치던 시절을 손꼽으라면 몇안되는 날중에 일등으로 손꼽는 날이 있다.
고등학생때 뮤지컬을 했던 일이다.
중학생때는 막연하게 작가라는 꿈을 갖고 있다 말하였지만, 그 꿈을 위해 내가 하는건 없었다.
고작 가끔씩 책읽는것과 시를 쓰는 일뿐.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어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두고 배우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생때부터 혼자서 국어책을 읽으며 연기를 하며 노는게 전부였는데,
책을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가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살수 있어서였고, 항상 그 여운은 깊이 남아 밖으로 표출하고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걸 연결짓다보니 배우가 제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엄마와 서울로 올라갔다.
당장 어디서 어떻게 오디션을 봐야하는지도 몰랐던 난, 엄마랑 서울구경만 하다가 돌아갔다.
엄마와 고민을 하다가 연기학원을 다녀보기로 했다.
바로 다음날 시내에 있는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엄마는 단한번도 국영수 학원은 보내주지 않았지만, 내가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마도 어릴때 연극부였고 한때 배우를 꿈꾸셨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엄마는 연기학원을 다닐때만큼은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다.
내향적인 편인 내가 연기학원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때의 친구들도 내 눈에 독기가 차있을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한다.
열정적인 나를 따르는 친구와 동생도 많았고, 대표님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지원해주었다.
학원생들과 작은 무대에 서보기도 하고,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경험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고3이 다가오고 입시반으로 전향해야할 시기가 다가왔다.
입시반에 가면 입시작품을 준비해야하는데, 노래, 춤, 연기를 각 선생님들에게 1:1로 작품을 만들어 연습을 해야했다.
그렇게 되면 돈이 꽤 많이 들어갔다.
학원비 따로 입시작품비 따로였는데 입시작품비만 월 70만원이 넘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부모님은 돈문제로 수도없이 싸우고 있었다.
아니 그때뿐만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난 그때부터 ‘내가 그정도로 연기에 열정이 있는 사람일까?’ 생각하고선 꿈을 접기로 했다.
그후로 모든게 무기력해졌다.
앞으로 뭘해야할지 앞이 깜깜했다.
고3 절반이 지나간 이 시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는것도 내겐 동기도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내가 가고싶던 대학교의 연극영화과 말고는 대학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바보였다.
어디 대학교를 가야하는지 과는 뭘 선택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른채로 아니 관심을 두지 않은채로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근처 학교에 있는 유아교육과로 들어갔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과였으나, 대충 성적에 맞게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생각없이 원서도 딱 하나만 쓰기도 했고, 경쟁률도 낮은곳이어서 무리없이 들어갔다.
한달간 다니면서 같은과 친구들은 나와는 다르게 대학생활에 목표가 있단걸 알았다.
유치원선생님이 되기 위해 공부하려고 모여든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친구들은 항상 학교 근처에 맛집들을 다니거나 술을 마시고 놀러다니며 대학교 생활을 누렸다.
매번 같이 따라갈때마다 주머니 사정이 곤란해졌다.
많은 용돈을 받지도 않았고 알바도 하지 않았던터라 돈이 부족해서 점점 친구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자발적 아싸를 자처하였다.
내가 원하던 학교도 아니었던곳에서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다보니 대학생활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처음엔 그래도 다들 대학교를 가니 나도 대학교졸업장이라도 받아야겠단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점점 들어온 목적도 목표도 흐릿해졌다.
그때에 난 “내 꿈도 아닌곳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느니 시간을 더 갖겠다” 라며 그럴싸한 핑계로 엄마를 설득하여 한달만에 대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다시 되짚어보면 사실 난 같은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좋아하고 열정넘치던 연기를 그만두게된것도.
원하지는 않았지만 평범하게 대학교 졸업장을 따내겠다고 들어간 대학교생활을 한달만에 그만두게 된것도.
돈이란 문제가 늘 따라다녔다.
어쩌면 형편없는 내 의지력과 목적의식 탓도 있을터다.
하지만 난 당장이 중요했다.
부모님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와중에 내가 미래를 꿈꾸며 여유롭게 현실을 살아가는건 어려운일이었다.
미래를 위해 그 순간들을 버틸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내게 돈은 사소한 꿈도 사치라고 느끼게 만들고, 미래가 아닌 현재에 내가 배를 채우는데에만 급급하게 만들었다.
미디어속에서 나온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라면으로 겨우 하루의 배고픔을 채우며 몇년을 버텨 기회를 얻었고,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서 모두에게 꿈을 가지고 포기하지말라고 얘기한다.
마치 나에게 의지박약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것처럼 들려왔다. 실제로 부모님도 내게 끈기가 없다고 말했다. 끝없이 나를 의심하고 자책했다.
굶어죽는한이 있더라도 꿈을 고집해야 했을까
더 악착같이 해야했을까
어쩌면 다 비겁한 핑계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괴로워질뿐이었다.
사람은 역시 어떻게든 살기위해 아등바등 한다.
마음의 소리도 생존본능이 발동한다.
’돈이 내 삶을 조금 피폐하게 만들었어도 마음까지 가난하게 만드는일만큼은 용납하지 말아야겠다.‘
자책하며 괴로운 마음을 난 이렇게 타일렀다.
그리고 적당한 타협만이 불행을 막는길이다.
내가 가난으로 힘들었던 나날들이 가져온 교훈은 그러했다.
사소한것으로도 복에 겹다 여기고 행복해하고 소중해하는 내 마음은 누구보다 풍요롭다.
그리고 지금은 미래를 꿈꾸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가난에 발목이 묶여 앞으로 나아갈줄도 모르던 바보가 늦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갈 수 있다는걸 알게 된후로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어쩌면 묵직하게 날 묶고 있는것에만 집중하여 발 디딜 생각조차 못한게 아닐까.
당장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무언가 때문에 주저 앉아있다면, 일어나서 제자리걸음이라도 걸으며 단련하자.
우리는 남들처럼 빠르게 달려나갈수 없어도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