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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한잔 Sep 05. 2020

이해라는거

이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

난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사람들의 대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장일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의심을 했던 적이 있다.


타인을 이해 못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긴하다.


타인의 기준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 하는것


무엇이 다를까?

내가 가진 기준에서 타인을 이해하려고 할때 나오는 말이, "난 널 이해할 수가 없어"와 같은 말이고, 타인을 타인의 기준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할때,


나는 그것이 진정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일수록, 이 진정한 이해를 노력해야한다.


타인을 타인의 기준에서 이해한다는 말은 그럼 도대체 무엇일까?


일단 여기서 '나'라는 개념과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지를 먼저 다뤄야 한다.

'나'라는 개념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느 하나의 '나'라는 본질적인 물체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주기적으로 죽고 바뀌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내 몸을 구성하는 뉴런을 제외한 모든 세포는 1년전의 나를 구성하던 세포와 같지 않다.

하지만, 뉴런(신경계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는 그러한 과정을 적게 거친다.

그리고 이러한 뉴런들은 뇌속에서 100조개 정도가 서로서로 아주 세밀한 연락망을 이루고, 이것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뉴런이 나인가?

뉴런중, 우리의 장기기억을 형성하는 뉴런들이 나에 가까울 것이다.

치매를 겪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해할것이다.

장기기억이 사라지고, 본인이 본인인지 모르는 '나'는 어떠한 '나'인지에 대해서.


그렇다면, 나는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가?

다른말로, 나는 내가 왜 어떠할 상황에서 무슨 행동을 만드는지 이성적으로 확실히 판단하며, 항상 일괄적으로 행동하는가?


나는 한번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날, 실수로 마시던 커피를 맥북에 흘려버렷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몇가지의 동장들을 진행하였다.

우선 겉면에 뭍은 커피를 닦았고 커피가 세어나오고 안으로 더 들어가지 않도록 맥북을 뒤집었으며, 곧장 헤어드라이기를 가지러갔다. 그리고 헤어드라이기를 이용하여 커피를 "건조" 혹은 "빼내"겠다는 생각으로 커피가 닿은 부분에 바람을 넣었다. 그리고 맥북의 키보드캡이 쪼그라들었다.


이 행동은 정말 멍청한 행동이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건 나는 이 행동이 멍청한 행동이라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커피를 업지른 날보다 꽤나 전, 나는 티를 한번 업지를적이 있고, 그때 똑같은 시퀀스의 행동들을 반복하였고, 뜨거운바람이 키보드에 좋지 않을거라는 생각하에 차가운 바람을 이용하였었다.


그리고 두 날의 차이점은, 커피를 마신날은 수면부족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수면부족이 불러오는 인지행동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있고 최근 Matthew Walker 의 책 Why we wleep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위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일까?

어떠한 시점에 환경적상황 (수면의 부족, 무엇을 먹었는지, 등) 그리고 그를 넘어서 유적적 조건과 자라오며 겪은 모든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등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주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아 우리의 행동은 대부분 결과론적으로 도출되며, 항상 일관적이지 않으며, 항상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도 '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뇌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과거에 겪었던 큼지막한 사건들을 기억하며, 어떠한 이유들이 내가 무슨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나를 완벽하게 아는것과는 아주 다르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이해할까?


그렇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나와 가깝고 중요한 사람이면 그 사람을 더욱 더 이해해보려고 노력 할 뿐.


이러한 마음가짐이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들과 연관이 있다면 믿겠는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양당주의(Bipartisanship)이다.

내가 맞고, 너는 틀려. 민주당이 맞고, 공화당은 틀려.

그리고 미국에서는 현재 심각하게 우와 좌가 분열되어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며 대화의 단절이 일어났고, 이러한 상황은 점점더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미국 혹은 우리의 경우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를(더나아가 지구를) 발전시키자는 목표는 분명 똑같을텐데, 서로가 다름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매도하며,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나는 맞고 너는 틀림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


이러한 문제는, 현재 인류가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로 보인다.


사회적인 문제로는, 현재 PC(Politically Correct, 혹은 정치적 올바름)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간단히 설명해서, 우리가 민감하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말했던 디테일한 이슈들에 대해 민감하게 접근하자는 것으로. 예시로는 밑에와 같이 장님이라고 말하지 말고, '시각적으로 결여된'과 같은 표현을 쓰자 와 같은 것들이 있다.

좋은 변화를 이끌어내고싶고, 다양성을 넓히고싶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싶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있는가?


그런데 특히, 미국에서는 PC혹은 Woke(좌파)아니면 나치(우파)와 비슷한 방식의 생각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며, 동시에 문제해결은 커녕 대화의 단절을 만들어 문제를 크게 만들어나가고있는것이 보여진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발점은 아마,


상대방은 나와 다름을 보지 못하고, 그사람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내 감정이 말하는대로 "너는 틀렸어" 혹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와 같은 접근법 보다는, 누군가가 어떠한 행동을 했으면, 그사람의 입장에서 "왜" 그러한 행동을 했을지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세상에는 절대악에 근접하는 정말로 사악한의도를 갖고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사람들은 빠르게 찾아내어 세상을 더이상 못망가뜨리게 막고, 정당한 대가를 치루게 해야겠지만, 동시에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기에, 위와같은 이해에 대한 접근이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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