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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Jun 09. 2024

위험한 민주주의, 더 위험한 언론

'어젠다 팔로워'가 된 언론

안녕하세요.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박영사)을 쓴 송승환 기자입니다.


책을 출간한 게 2021년 10월이니 아직 3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 환경,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의 작동 방식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 생각하고 있는 고민의 요지를 먼저 말씀 드리자면,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대의 민주주의와 여기에 세트로 성장한 언론 모델이 이제 더 이상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학계에서는 민주주의가 위험하다는 내용의 책과 연구 결과가 많이 쏟아지는데,

아직 언론학계에서는 현대 민주주의가 정상 작동하기 위한 세트로서 성장해온 언론의 역할이 제기능을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

오작동, 그러니까 사회를 망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건 아니냐는 경고를 담은 제언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실증적인 관찰과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한 주장이라 함부로 말하기 어렵지만 현장에서 많은 기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는 걱정입니다.

대표적으로 미디어 환경 변화와 이에 따른 수익 감소로 인한 언론사의 기능 변화가 가장 눈에 띕니다.

과거 디지털 혁신 바람이 불 때부터 최근 AI 혁명이 온 산업을 뒤집고 있는 동안에도 대다수 언론사는 이에 맞는 업무 방식이나 과정 및 결과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통적인 언론사의 수익모델인 기업의 광고비 총액이 감소하고 점점 신문, 방송이 아닌 다른 미디어로 옮겨가면서 경영상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언론사가 '디지털 대응'이란 것을 하고 있는데 쉽게 말해 실시간 '제목장사'입니다. 오늘 인터넷 커뮤니티, SNS 등에서 화제가 되는 이슈를 뉴스 형식으로 빠르게 정리해 내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클릭해보셨을테니 더 자세한 설명은 굳이 안 해도 될 거라 생각이 됩니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면, 언론이 '어젠다 팔로워'가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론의 역할 중 하나는 '어젠다 세터'라는 기능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에게 무엇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떤 것에 집중하고 논의해서 합의를 내야 하는지 언론이 설정해준다는 기능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언론은 시민들이 더 시간을 들여서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의제와 가볍게 알아도 좋고 몰라도 되는 사안들을 구분하도록 도와줬습니다.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기능으로 '게이트 키핑'이라는 말도 저널리즘에서 자주 쓰입니다.

언론이 문지기처럼 길목에 서서 어떤 사안이 시민들의 주된 논의 의제가 될지 아니면 시시콜콜한 얘기가 될지 결정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언론의 기능이 과하게 작동할 때 이른바 '언론 권력'이 시민의 이익과 무관하게 대세가 될 주제와 묻힐 주제를 결정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능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정된 자원을 공동체에 더 중요한 이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화제가 되는 사안이 곧 언론의 어젠다가 되고 있습니다. 언론이 이 화제거리를 쫓아다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거 같아서 저는 '어젠다 팔로워'가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화제가 되는 사안이 언론의 어젠다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위험한 이유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화제를 만드는 사람의 의도를 생각해보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유튜브 쇼츠,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커뮤니티 등에서 화제가 되는 콘텐츠는 공공의 이익이 아닌 제작자가 수익, 관심 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집니다. 때론 이를 위해 조작 등의 방식으로 시민의 이익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게 이 공간에서 단순한 재미나 수익활동으로 소비되는 것은 문제가 없거나 작은 문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걸 언론이 시민에게 오늘 알아야 할, 지금 이 순간 알아야 할 '뉴스'로 만들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언론이라는 공공의 논의를 위해 쓰여야 할 채널이 (언론이 누리는 여러 특혜는 이 때문에 그동안 인정돼 왔습니다. 이른바 '시민의 알권리'를 위해 대신 일 한다고 해왔습니다.) 이런 간식거리와 같은 이슈를 사회의 어젠다로 설정하면서 정말 영양가 있는 식사와 같은 어젠다는 논의될 자리를 잃었습니다.

비유컨대 시민들이 영양가 있는 식사를 못하면서 현대 민주주의는 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제목장사' '클릭장사'를 하게끔 만드는 언론사의 수익 악화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사의 수익이 줄어드는 이유 중 하나는 정보의 매개자로서 언론의 기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최근 6개월 동안 2차 육아휴직을 하고 곧 복직을 앞두고 있는데, 이 기간에 신문, 방송 뉴스를 거의 보지 않고도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시사 이슈를 정리해주는 유튜브 채널, 경제 이슈를 정리해주는 유튜브 채널, 그 외 스포츠, 연예 소식을 요약해 보여주는 게시글이나 쇼츠 등으로 충분히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했습니다. (+최소한의 직업적 의무감으로 연합뉴스 한 줄 속보는 챙겨봤네요.)


이런 정보 소비 행태에서 제가 느낀 것은,

꼭 언론이 뉴스로 정보를 매개하지 않아도 필요한 정보를 배달해주는 다양한 채널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거였습니다.

게다가 내가 꼭 알고 싶고, 관심 있는 소식은 그 주체를 직접 SNS에서 팔로우 하는 방법으로

'그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연예인, 유명인, 운동선수, 슈퍼스타, 예술가, 배우, 전문가, 기업 등 대부분의 주체의 입장을

언론을 거치지 않고도 정보를 직거래 하는 게 당연해진 미디어 환경에 우리 모두 살고 있습니다.

같은 정보라면 굳이 언론을 통해 들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언론은 하나 더 물어봐서 누구나 아는 정보에 빠진 정보를 채워주는 역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저 전달만 하는 역할은 이제 과하게 말하자면 안 해도 되겠죠)


그래서 저는 요즘 언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기능은

1) 시민이 알아야 할만한 내용을 정말 쉽고 흥미롭게 풀어서 떠먹여주기

2) 정말 많은 이슈와 논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맥락을 해설하기

3) 하나 더 나아가, 어젠다가 돼야 하는 주장을 하는 화자의 의견을 널리 소개하고 이런 얘기를 해줄 만한 사람을 계속해서 발굴해 내는 것

이라고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을 하는 언론사가 '제목장사' '클릭장사' 없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경영 위기' '수익 악화'를 극복하고 버텨낼 방법이 있을까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의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미디어 컨설팅을 하는 지인이 있는데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요즘 저의 언론에 대한 고민을 다시 요약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 고장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도 고장났고, 언론의 고장은 민주주의의 고장을 더 나쁜 상황으로 만든다.

2) 그 현상 중 하나가 언론이 어젠다 세터가 아닌 어젠다 팔로워가 돼 버린 것인데,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3) 정보의 매개자 역할을 과감하게 줄이고 맥락의 해석자 역할이 더 커져야 한다.

4) 그런 언론은 과연 시민의 지지를 받고 시장에서 경영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원래는 육아휴직 복직을 앞두고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소회를 적어보려 했는데

요즘 고민을 적다보니 이미 호흡이 많이 길어져 버렸네요.

이달 마지막 주 복직을 하는데 그 전에 원래 쓰려 했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더워진 날씨 잘 이겨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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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 (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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