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다른 성으로 태어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 해봤겠지? 나는 남자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영화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히 육체만 바뀌는 정도라면
굳이 심각할 필요까진 없겠지.
아니다. 그것도 꽤나 혼란스럽겠네.
더군다나 어머니, 회사 동료, 친구 등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역시 여성은 되고 싶지 않다.
특히나 한국에서 단순 호기심 만으로
여성으로 살아보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다.
솔직해져 볼까.
난 여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을 받아 왔는지 모른다.
여성이 겪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정보는
지금껏 기사 몇 줄과 책을 통해 얻은
여러 파편들을 모아놓은 게 전부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얻은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차별이 만연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하다.
책 <82년생 김지영>은 주인공 김지영이
30년 넘게 여자로서 살아온 평범한 일상을 담았다.
노회찬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땅의 82년생 김지영을 안아달라”며
이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책은 여러 통계들을 인용하며
책 속의 김지영이 살아오며 겪은 현실을 보여준다.
김지영이 겪은 갖가지 성차별의 경험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자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폭력과 공포를 겪어야 했고 기회를 박탈당해야 했다.
김지영의 이야기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은 사실 그 자체다.
여성 지인들과 이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당연하다는 듯 이 이야기에 공감했다.
과거에 덮었던 상처가 떠올라 고통스럽다는 경우도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담은 이야기였지만
내겐 새삼 충격이었다.
누군가는 뭐 이 정도로 충격을 받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난 왜 이제서야 유난스럽게 반응하는 걸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아마 난 성차별 문제에 대해 무뎠거나
심지어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치부해왔겠지.
남자라는 안전망 안에 있으니까.
혹시 가해자였던 경우는 없었을까.
남성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꼭 물리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폭력이나 차별을 가한 적은 없었을까.
지금 당장 손해 볼 것 없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에
눈 감았던 순간은 없었을까.
책에 나온 내용과 비슷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너무 많이 떠오른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까지 쓸 것도 없이
방관,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 순간
난 이미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겠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자.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김지영이 겪어야 할 일들을 겪지 않을 수 있었고,
김지영이 누리지 못한 것을
난 누릴 수 있었다. 난 그렇게 살 수 있었다.
이 땅의 많은 여성들이 그래 온 것처럼
누군가 나 때문에 조용히 울음을 삼킨 경우도 있겠지.
여성으로 살지 않아봤기 때문에 몰랐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최근 아이린이 이 책을 봤다는 이유로
논란이 일었던 황당한 일도 있었다.
많은 남자들이 이 책을 리트머스지 삼아
여성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는
정신 나간 한남 대열에 합류하기 이전에
이 책을 보면 좋겠다.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부끄러움에 대해 나누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늘상 일어나고 있는 성차별에 대해 인식하고
내가 갖고 있는 권력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받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한 순간에서야
여성과 남성 간 구분할 필요 없이
사람 그 자체로 서로를 인식하는 세상이 될 수 있겠지.
요즘 근본 없이 튀어나온 그놈의
‘이퀄리즘' 같은 이상한 말 좀 그만하고.
그러지 좀 말자.
Written by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