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순이 Dec 29. 2020

그 시절, 취업과 플랜 B

과거 #1

"그만둘래."

앞뒤 다 자르고 이 한마디만 신랑에게 보냈다. 단호하게 결심한 내 의지가 보였던 걸까? 신랑도 무슨 말인지 냉큼 알아듣고는 쉽게 수긍했다.

"그래, 그만둬."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매년 나오는 말이지만, 그 해에도 역시나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최악의 취업난"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구직에 열정적이지도 않아서 별로 와 닿지는 않았다. 안 되면 말지라는 팔자 좋은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꼭꼭 숨겨놓았던 플랜 B도 있었다.


플랜 B를 설명하려면 좀 더 먼 과거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을 곧잘 해서 이과 외에는 다른 길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독서 광인 우리 언니에게 묻혀서 사실 내가 책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책 안 읽는 아이로 비쳤고 주변에서도 으레 그런 말을 했기에, 나 역시 문과 타입은 아니라고 스스로 규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럭저럭 받은 수능 점수에 맞춰서 서울에 있는 공대에 진학하였다. 그곳에는 자신의 꿈을 명확하게 알고 들어온 친구들이 많았다. 자동차에 열광하는 그들 사이에서 혼자 튀고 싶지 않아서 나 역시 관심을 가져보려 노력했다. 그렇게 말 그대로 생기 없이 꾸역꾸역 다니다 보니 4년이 아닌 6년 만에 졸업반이 되었다. 졸업을 앞둔 친구들은 모두 초조해 보이긴 했지만, 착실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의 모두가 뚜렷하게 그린 그 미래는 회사에 들어가서 연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내 마음 한 편에는 유학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어에 관심이 많고, 다른 나라에 가본 적도 없어서 환상이 가득했으며,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해 본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내 안에 있는 문과를 향한 갈망이 깨어나고 있었으며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이 일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 상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현실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래도 토플 점수가 높으면 방법이 생기겠지 라는 생각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 엄마는 빨리 이력서를 내보라며 재촉하셨다. 대학교 이후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잘 다듬어진 직선 도로 같았고,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에 가듯 당연한 절차였다. 그 길은 평범하고 순탄하며 쉬워 보였다. 단순히 유학 가고 싶다는 마음만 있고, 정확하게 무슨 공부를 할지 세부적인 사항은 없었기에 플랜 B를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남의 나라에서 고생할 생각을 하니 겁도 났다. 이쯤 되니 내가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아 졌다. 내 인생이지만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운에 맡겼다. 일단,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다가 다 떨어지면 '할 수 없잖아, 이렇게 된 거."라며 훌쩍 해외로 떠나는 것도 괜찮은 듯했다. 그러나 설렁설렁 대하는 자세는 용납할 수 없어서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를 여러 번 고치고 교정받았으며, 면접을 위해서 기업의 연혁을 달달 외웠다. 그 기업과 관련된 책들도 닥치는 대로 읽고, 여러 가지 뉴스를 찾아보기도 했다. 나의 노력이 통했던 걸까? 덜컥 글로벌 기업에 붙고 말았다. 취업이 힘든 시기에 합격한 나 자신이 기특했고, 가족들도 진심으로 기뻐해 주어서 당연하게 입사를 하게 되었다. 소심하게 품어보았던 내 플랜 B는 그렇게 없던 일이 되었다.


입사를 하게 되니 그저 신이 났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 회사에 들어간 데다 전공을 100% 살렸다는 뿌듯함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자니 콧노래까지 절로 나왔다. 회사를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싶었고,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싶었다.


팀에 들어가니 벌써 나에게 배정하겠다고 그들끼리 정한 직무가 있었다. 글로벌 기업이라 영어 실력이 업무에 크게 중요했기에, 높은 토익 점수가 특기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직무 하나를 통째로 맡고 그 업무의 외국 담당자들과 최전선에서 협력해야 했다. 영어를 워낙 좋아하는 지라, 전 세계 동료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은 재미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회사는 업무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 회사의 위계질서나 상하 조직 문화는 많이 낯설기도 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거나, 남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에는 재주가 없었고, 상식적이지 않은 문화를 따라야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으며 동의할 수도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만약 순수 토종 한국 회사였으면 난 한 달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신발은 주말에 놀 때나 신어."

"말투가 왜 그래? '습니다'라고 해야지!"

"책은 사무실에서 꺼내지 마. 일하는 시간에 읽으려는 건 아니겠지?"



업무 외의 지적이 많아지자, 불만이 점점 쌓였다. 일만 깔끔하게 잘하면 되는 건 아닌지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난 이렇게 삐뚤어지고 마 것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