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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4. 2020

사색83. 불순한 비교

5월 14일(수)

새벽 6시, 눈이 떠진다. 오전이다. 오늘도 전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의식하게 되니 괴롭다. 하필, 이럴 때 오전에 일어나지다니 억지로 잠을 청한다. 그렇게 찾고 싶었던 오전 시간인데 괴로움을 줄이려면 잠으로 의식을 죽이는 수밖에. 


오전 10시 즈음 다시 깬다. 운동장으로 나가 달린다.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버리려 발길질을 해본다. 발바닥이 땅을 딛는 것 같지 않다. 서해 뻘에 발목이 잠긴 듯 걸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결국 세 바퀴도 못 달리고 그만둔다. 혹시, 벨이 울릴까 손에 꼭 쥔 휴대폰은 여전히 울림이 없다. 젠장, 그만 다 포기할까 싶어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던지려다가 그러면 다시 사야 할 테니 호주머니에 넣는다. 순간 문자 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사장 면접 일정을 문자로 알리진 않을 테니 기대 없이 메시지를 열어본다. 교회 교인 중에 어렵게 하루를 연명하시는 분이 있다. 그분이 오늘 밥 사 먹을 돈이 없다고 만원만 보내달란다. 이 양반이 지금 내가 실직한 줄 모르나, 내가 회사에 있는 줄 알고 그러나? 아니, 지금 내가 돈 없는 건 아니지만 놀고 있는 걸 알면 이럴 염치가 없을 텐데. 아니, 염치를 고려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파 구걸하는 게 잘못인가.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지금 이 분 보다 나은 형편 아닌가. 불순한 비교로 위안을 찾는다. 계좌를 알려 달라고 해서 2만 원을 보낸다. 5리를 가라거든 10리를 가라고 하지 않았나. 좋은 일 하면 사장 면접 전화가 올까, 취직될까, 실로 주술적인 마음이다. 만원만 달라한 게 다행스럽다. 2만 원 달라했으면 4만 원 보내기는 부담스럽다. 밥 사 먹을 돈이 없어, 배가 고프다는 건 실직으로부터 파생한 우울함과 비할 바가 아닐 듯, 인간의 밑바닥을, 별로 친밀한 관계도 아닌 나에게 문자로 구걸하게 만들 정도인 삶, 그의 하루는 어떨지. 그 비참함이 오늘 나와 어떻게 다를까.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 않고, 해직 동료 선준욱 과장에게 전화가 온다. 선 과장은 최근에 어떤 회사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 정작 자기가 가지 않겠다고 했단다. 놀랍다! 선 과장은 이번 기회에는 회사가 자신을 선택하기보다는, 자신이 회사를 선택해서 가겠단다. 놀랍다! 이런 자세는 현대 한국 고용시장에서 제3의 물결 같은 구직 행태이다. 그리고 우릴 짜른 회사에 부장 자리 채용 공고가 게시됐단다. 차동수 부장이 그만둔 거 같단다. 놀랍다. 차 부장, 그렇게 그만둘 거면 우리 짤릴 때 자기도 사표를 함께 날렸다면, 그럼 우리한테 평생 가오라도 잡았을 텐데. 선 과장은 차 부장도 사장 헛지랄을 참다 참다가 그러지 않았겠냐고, 참다 참다가. 도대체 사장은 회사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차 부장한테 직접 전화해서 뭔 일이냐 알아보기도 그렇고, 사장의 아마추어 같은 경영 전략 문제로만 보기에는, 인간성 문제인가. 여하튼 답답한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나 보다.    

  

목욕이나 간다. 그동안 질레트 3중날 마하3 면도기를 써왔는데, 오늘 4중날 퓨전 면도기로 바꾼다. 3중날, 4중날 뭐 그리 차이 날까. 스킨로션, 쉐이빙 크림도 사고, 세안제도 산다. 목욕 용품에 돈을 쓰고 있다. 온탕에 앉았다. 마음을 추슬러본다. 겨우 이런 일에 쓰러질 건가? 지금 면접이 중단된 J회사가 그리 가고 싶은 회사도 아니었잖아. 이게 물 건너갔으면 또 찾으면 되지, 쫄아 있지 말고, 하고 싶었던 게 있으면 그걸 하면서, 이 시간을 잘 보내자고 마음을 다진다. 그동안 다니고 싶었던 드럼 학원을 찾아 레슨을 받을까 싶다. 알아봐야겠다. 언제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알았나. 언제 내가 이 나이에 실직자 될 줄 알았나. 언제 내가 평일 대낮에 목욕탕에 앉아 있을 줄 알았나. 타인의 경우라고 생각했던 부친의 소천, 실직, 이런 일들이 내 문제로 내 앞에 펼쳐지는 데, 이건 현실이 아닌 꿈이다 하고 있는 게 올바른 자세인가. 나는 예외일 것이라는, 지금껏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고, 아니 남들은 그래도 나는 그럴 일 없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가. 기분이 한 시간 안에 오르락내리락 수십 번 반복한다. 긍정적인 점을 찾자, 기회를 도모하자 하다가 시팔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며 왔다 갔다 정신 혼미해질 정도이다. 이런 감정 기복이 자연스럽지만 한편은 안쓰럽다.      


간밤에 김성한이 왔다. 내 방에서 홀아비 냄새가 심하다며 코를 틀어막곤 코맹맹이 소리로 내 면접은 어찌 됐냐 묻는다. 사장 면접 일정이 미뤄졌고, 이후 전화가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돼간다고 대답한다. 이제 포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짜식들이 프로답지 못하게,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 채용 절차를 깔끔하게 알려줘야지, 사람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게 어디 있냐고 짜증을 낸다. 인내심, 얼마 없던 신앙심도 이젠 다 끝난 것 같다고, 신앙인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이제 다 필요 없다고 거칠게 말한다. 코를 막고 내 투정을 듣고 있던 성한이는 실직자가 신앙 그런 거 모색할 것 없이, 그냥 회사 짤린 거라고, 하나님의 시련이니 그런 게 아니라고, 현대사회, 특히 내 직종은 잦은 해고, 실직이 일어난 것이라고 고난, 시련이니 이런 식으로 무겁게 이해하려 하지 말란다. 그리고 면접은 계속 들어오고 있는 거니 구직 반응은 점점 좋아지는 거고, 또 마지막 통화에서 채용이 취소됐다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니 너무 걱정 말라고, 결국 취업은 될 것이니 그동안 해보고 싶은 거나하라고, 막상 일하게 되면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다고, 지금은 시간이 있지 않느냐며 차분하게 말한다. 실직자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도 시팔 네가 짤려봐야 이 마음을 알지, 너도 짤려버려라 하고 악다구니를 부린다. 이에 성한이는 자기도 지난주에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던 여자랑 결국 헤어졌다고, 개포동에 주공아파트 전세 얻어 나랑 같이 살잔다. 젠장, 젠장, 젠장. 너도 슬프구나. 아, 누구나 각자의 풀리지 않는 문제, 괴로움, 어려움의 총량은 각 개인에게 일정하게 있고, 상대적으로 균등하게 배분된 것 같다. 그런데... 네가 괴롭다니 이상하게 나에게 위로가 될까. 나만 아픈 것보단... 아, 실직은 인간을 이리 저질로 만들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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