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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 May 03. 2024

네르하의 밤, 마법인듯 꿈인듯

디지털 노마드 in 스페인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 전 마지막 밤은 마법을 부린다. 일단 다음날이 토요일이라 수업이 없어서 일찍 자야한다는 부담이 없다. 현재 여행지의 마지막 날이라 아쉬운 마음은 최대치이다. 이 조합 덕분에 네르하의 마지막 밤, 마법같은 술집을 만났다.



네르하 번화가에서 살짝 떨어진 골목을 걸으며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인적도 드물고 대부분 가게들도 문을닫은 고요한 골목에 따뜻한 불빛이 반짝이는 가게가 보였다. 창문 안으로는 연세가 지긋하신 손님들이 환한 미소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기심 반, 좋은 분위기 반, 나는 홀리듯이 가게쪽으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사진만 찍을 생각이었는데 가게에 가까워지니 익숙한 올드팝이 흘러나왔다. 그게 결정타였다. 한번도 안해본 일탈. 11시가 넘은 시간에 그렇게 우리는 동네 술집에 발을 들였다.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따님으로 보이는 분이 보였다. 손님들을 위해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주문을 받고 인사를 나누며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다. 하지만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고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섬세하게 손님들을 챙기셨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주문을 받으셨는데 인자한 미소로 메뉴를 함께 보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남편은 기네스 생맥주를 나는 따뜻한 라떼를 시켰다. 기네스 맥주의 상쾌한 맛과 우아한 색이 절묘한 조화를이뤘다. 라떼는 커피와 우유가 따로 나왔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머그잔이 큼지막했는데 그것보다 더 큰 미니 주전자에 우유가 가득했다. 나는 몇번에 걸쳐 커피에 우유를 쪼르르 따라 마셨다.



분명 라떼를 마시고 있는데 술이라도 한잔 들어간 듯 나른하게 긴장이 풀렸다. 구수한 올드팝에 까딱까딱 고개도 흔들고 라떼 한잔에도 공짜로 내주시는 타파스 한접시도 야무지게 비웠다.


냅킨으로 입을 닦으려는데 귀여운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호기심이 돌아 함께 적힌 스페인어 문구를 파파고 번역기로 돌려보았다.



나는 의문이 있다

모든 것이 비싼가요,

아니면 제가 가난한가요?


귀여운 소녀의 세상 심각한 의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터졌다. 그때 문득 한국에서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마트에서 장 한번 보려면 엄청난 계산과 고민에 빠졌던 내 모습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치솟는 물가에 과일 하나 양껏 사지 못하고 사과와 토마토 중 어느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머리를 싸매곤 했다. 그때는그게 평범한 서민의 일상이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스페인에 오니 마트 물가가 한국의 반절밖에 안되었다.


맛있는 과일(딱딱한 수입산 오렌지와 달리 이곳 오렌지는 과즙이 풍부하고 당도가 높다), 치즈(모짜렐라, 부리토, 페타, 염소치즈 등등등), 고기(이곳은 기본적으로 냉동고기를 취급하지 않는다. 생고기는 맛과 질감부터가 다르다), 과자(버터 등 유제품과 좋은 밀가루가 풍부하니 맛은 보장될수밖에), 조리식품들(이곳 마트에서는 직접 요리한 다양한 집밥 메뉴들을 판다) 등등을 반값에 먹을 수 있다.


장바구니 가득 물건들을 담았는데 5만원도 안되는 현실이 처음에는 마법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비쌌고 그래서 나는 가난했다. 이곳에 오니 나는 그대로인데 삶은 풍성해졌다. 냅킨속 소녀의 의문이 바로내 이야기였다.  



많은 상념들과 함께 나는 냅킨 한장을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도 주인도 그저친구 같은 이곳. 다들 처음 만났지만 어제 본 사람처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때는 내일의 행복을 빌어준다. 먹고 살려고 일하는 걸 넘어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눈다.


어두운 골목에 반짝 따스한 불빛이 비치고 몽글몽글한 올드 팝이 흘러나오는 그곳을 만난다면 지나치지 마시고 들르길. 처음 만나는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마법인듯 꿈인듯 네르하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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