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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밀화원 Jan 24. 2022

진갈색 마법가루

보글보글 뽁뽁뽁 쪼르르르 보글보글 뽁뽁뽁뽁

4년 전 겨울, 남편과 강원도에서 연말을 보내기 위해 떠났다. 동해와 양양을 아우르는 강원도 여행의 시작은 동해 어느 폐교를 게스트하우스로 꾸민 숙소였다. 우리가 묵었던 날은 사장님의 지인들이 머물기도 하여, 의도치 않게 음주 파티가 이어졌다. 조용하게 보내고 싶어 신청했던 곳인데, 그 나름대로 또 재미있었다. 다음 날 숙취로 휘청거리는 우리에게 사장님은 드립 커피를 권했다. 그제까지 커피는 많이 마셔봤어도 드립 커피를 내려볼 기회는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남편은 메모까지 해 가며 사장님 말씀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드립 커피는 먼저 물을 원두에 물을 1/3 정도 부어 원두에게 이제 시작할 거라는 기별을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장기들에게 기상을 알리는 한 모금의 미지근한 차처럼 말이다. 그 뒤에 본격적으로 달팽이의 껍질 모양처럼 회전을 하면서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물을 조금씩 부어 주었다. 처음 물을 부어 주었을 때, 원두는 보글보글 거리며 원두 사이사이의 공기층을 위로 내뿜었다. 갯벌에서 조개나 게를 잡을 때 공기구멍을 찾듯이 말이다. 뽁뽁뽁 소리를 내며 원두는 물과 만나 진한 갈색의 씁쓸하고 따뜻한 음료를 내려주어 몸을 데워주었다.


오랜만에 시간이 생겨 겨울 베란다를 정리했다. 겨울은 가드너에게 비수기이자 인고의 시간이다. 차디찬 계절이 얼른 지나가거나, 베란다 온도가 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는 나날들로 가득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가장 춥다는 ‘대한’이라는 절기가 지나서 인지, 베란다를 통과해 느껴지는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창고처럼 이것저것 쌓여있는 베란다를 정리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렸다. 미뤄왔던 사랑초와 녹차 심기를 했다. 녹차 열매는 도토리처럼 생각보다 컸고 동글해서 언뜻 보면 유명한 초콜릿 과자처럼 보였다. 녹차로 유명한 하동 여행에서 얻어진 것이었는데, 집안에서 이곳저곳 굴러다니다가 결국 베란다로 쫓겨나고 어제 화분에 그득 심어주었다. 사랑초의 구근은 여러 종류 나눔을 받았다.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물 중 하나가 사랑초이다. 색깔과 종류도 다양해 사랑초만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겨울에 꽃을 보기 위해서는 가을쯤에 심어줘야 하는데 게으른 가드너는 1월 중순이 넘어서야 구근 심기를 했다. 아무것도 없는 지퍼백 안에서 사랑초 구근들은 이미 깨어나 기다란 뿌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다.


녹차와 사랑초들을 화분에 심어주고 마지막 작업인 물 붓기만 남았다. 물을 조금씩 부어주면서 흙에서 뽁뽁뽁 구멍이 송송 뚫리며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흙도 원두처럼 흙 사이의 공기층을 물이 메꾸고 다져 주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여러 번에 나눠서 물을 줘야 한다. 물을 여러 번 주면서 드립 커피가 떠올랐고, 추운 겨울 추억 여행도 흙 사이의 공기층처럼 내 안에서 올라와 주었다.


흙과 원두는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물과 만나면 나는 소리부터 똑같다. 뽁뽁뽁 보글보글.

색깔도 비슷하다. 진한 갈색의 가루 입자로 되어있고 입자의 크기도 비슷하다. 향이 난다는 점도 동일하다. 흙냄새를 베이스로 한 향수도 있지 않은가.  또 밥과 연결된다. 커피는 밥 먹고 나면 생각나는 기호식품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필수 식품이 되어버렸고, 흙을 만지고 나면 등, 허리가 아프면서 밀려오는 허기에 밥 생각이 간절하다.


무엇보다 둘 다 결실을 만들어 낸다. 커피는 그 자체로 열매이기도 하다. 커피를 마신 사람은 부스터를 단 것처럼 어떤 결실을 만들어 내기 쉽고, 흙은 잎을 만들어 내거나, 꽃과 열매를 볼 수 있는 근원이다. 지척에 있는 마법가루들을 못 알아봤다. 흙을 만지고, 마법가루가 만들어준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마법 같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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