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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낙영 Jan 11. 2022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 되려고요

내가 나에게 하는 약속

1년 8개월도 모자라 하루를 더 지나 두 번째 브런치 글을 쓰게 되었다. 일이 바빴다는 핑계를 뒤로하고, 부끄럽지만 또다시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이것이 정확하고 정직한 표현이다. 지난 글을 쓰며 정말 좋은 회사에 정착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나 갈망하던 문화예술 분야에 기회가 닿았고, 입사 전 근무 조건은 정말이지 꿈에 그린 모습 그대로였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알고 있었더라면, 카페 안이든 길거리 한복판이든 콩깍지를 걷어내려 양어깨를 쥐고 마구 흔들면서 이렇게 얘기해줬을 테다.


안심해하면서 안주하지 말고, 시간 날 때 뭐든 준비해 둬!

물론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지금처럼 빈둥거렸을 수도 있지만, 하루라도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보다 두 살이나 더 어렸으니 말이다. 아니면 1년 8개월만 걸렸을 수도 있다. 오래된 사진에서나 볼 법한 감성이 담긴 멋스러운 공간이며, 그 안의 구성원들은 또 얼마나 멋졌던가. 본인의 멋과 취향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노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인 생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는 걸 생각하지 않는 정도의 자연스러움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이 회사 보안시스템에 지문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는 E.T 한 장면의 떨림, 그것과 진배없었다. 내가 원하던 분야에 지문인식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당시 결혼을 염두에 둔 내게 "결혼한 여성이 오래 일하기에 이만큼 이해해주는 좋은 조건의 회사가 없다."라는 말은 블랙홀로 훅- 빨려 들어가는 듯한 엄청난 이끌림이었다. 직장인 10년 차이자 결혼 5년 차가 된 모습이 그 말이 끝나는 찰나 메이킹 필름처럼 눈앞에 보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그 회사는 존재만으로 비전과 목표를 심어준 회사였다. 그 갸륵한 뜻이 나에게까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욕심을 슬쩍 내보았다.


그 말 순전히 거짓말 아니었다. 주어진 일만 잘 해결한다면 결혼한 여성에게는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회사였다. 문제는 이 회사에 다니며 내게 결혼할 시간이 주어질까 하는 것이었을 뿐. 더불어 내가 소속했던 팀은 정말 말 그대로 '주어진 일'만 하는 곳이기에 수직 성장은 절대 꿈꿀 수 없었다. 이곳은 분명 운명처럼 찾아온 기회였고, 나는 서른을 넘겼고, 애매한 연차였기에 이직을 다시 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이었다. 그 순간 너무나 말도 안 되게 또 한 번의 환승 이직 기회가 찾아왔다. 연봉도 높아지고 내가 원하는 분야의 업무 배정과 나와 맞는 사람들로 팀 세팅을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이직을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회사도 잘 마무리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행복해질 일뿐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지독히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릴 때 나는 쌍문동 어느 빌라에 살았었다. 아주 흐릿한 기억들이 남아 있을 뿐 정확한 것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혜화동(혹은 쌍문동)>의 노래처럼 따뜻함은 없다. 하늘에 맞닿을 것 같았던 검은 비탈길, 한없이 이어진 전봇대의 전깃줄, 고통스러워하는 오토바이들의 한숨 소리가 생각난다. 그리고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다다를 때면 숨이 차올라서 무릎을 한 번씩 짚었던 엄마의 구부정한 자세와 숨소리가 생각난다. 그 기억이 나쁘진 않지만, 살기 굉장히 힘들었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준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동네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바로 다음 날, 똑같이 생긴 아파트 빌딩 숲 사이에서 우리 집이 어디인지 몰라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무지막지하게 높았던 아파트 크기에 눈물을 흘렸는데, 지금은 무지막지하게 높아진 아파트 가격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래서 순수한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곳에서 자가로, 전세로, 월세로 모든 임대방식으로 살아봤다. 구성원이 바뀌진 않았지만, 묘하게 달라지는 집안 분위기로 집안 사정을 눈치채곤 했다.


월세로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사 가는 일이 잦다. 한날은 등교한 집과 하교한 집이 달랐던 적이 있다. 새로운 집에 도착했는데, 한 엘리베이터로 짐이 옮겨지고 있었다. 장판을 거침없이 오가는 박스 사이, 내 짐을 쏙쏙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이사는 우리 가족에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매번 '이제 이사 좀 그만 갔으면 좋겠다.'라는 소원 빌기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나는 이사를 너무, 정말, 완전, 진짜,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싫어했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은 드디어 옮기는 삶을 청산하고 작고 귀여운 소중한 집으로 이사를 왔다. 집이 주는 이 엄청난 안정감은 늘 불안정하게 바들바들 떨었던 내 삶을 완벽히 따뜻하게 감싸주는 포근한 담요처럼 느껴졌다.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정말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으련만, 여전히 직장으로 나서는 나는 빌딩 숲에서 꺼이꺼이 흐느끼는 그 꼬마 같다. 일에 있어서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다 오늘 퇴근길에 이 문장이 불쑥 떠올랐다.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 되자.

나는 모든 회사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그게 문제였다. 최선만 다한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기억에, 손에 남는 게 없었다. 이것은 현재 내 경력 관리와 포트폴리오에 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목적 있는 삶을 살면서 그 삶을 준비하는 방법과 과정을 기록하는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위에서 언급한 노래의 가사처럼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을 잊지 않고 기록하다 보면 언젠가는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다. 브런치에 다시 기고한다는 것은 어쩌면 첫 번째 목표를 실행하고 있다는 증표이지 않을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하는 오늘의 고민과 생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매일 짧은 글이라도 작성해보려 한다.


현재는 직장에 초점이 많이 맞춰질 수도 있겠지만, 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나의 장점은 무엇일지, 나의 한계는 어디일지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 있게 이어질 수 있길 바라며, 오늘보다 부지런한 나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여전히 회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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